서울 금강사 주지 자우스님

“금강사가 태아영가천도도량으로
특성화 되어 있듯이
한 가지 전문영역 확보하고
템플스테이 활성화해야” 

종단소임 두루 역임했으며
경찰포교 앞장 경승단 창단 주도

“경승교구 만들어 포교해야” 강조

자우스님은 금강사가 태아영가천도도량으로 특성화 되었듯이 전국의 공찰이나 사설사찰은 그 나름대로의 전문화 영역을 확보해야 사찰운영과 포교를 극대화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세심동산(洗心童山)이라는 지명이 있다. ‘마음을 씻는 동산’이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닿아 있는 그 곳에 금강사가 위치하고 있다. 금강사는 두 가지로 유명하다. 하나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태아영가 천도도량이고, 다른 하나는 장학재단인 ‘금강사장학회’다. 이 사찰 주지 자우스님은 일찍이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으며 종단의 행정을 두루 섭렵하기도 했다. 도심포교의 원력을 세워 서울도심 도량인 금강사에서 30여년 동안 정진해 온 주지 자우스님을 만났다.

- 금강사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요?

= 대학시절 금강사를 창건했던 석옹노스님을 시봉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무문관에서 정진하고 계셨는데 저를 어여삐 여기셨는지 어렵게 대학을 다니는 저에게 등록금을 지원해 주셨어요. 그 인연으로 금강사 주지를 이어 받아 지금까지 포교원력을 펼칠 수 있었어요.

- 종단 행정에 일찍이 눈 떠서 전문가가 되셨어요.

= 은사이신 경산스님께서 총무원장을 역임하셔서 본의 아니게 비서실장부터 기획실장, 포교부장, 재무부장 등을 거쳤고 종회의원 소임도 보았지요. 20여년 동안 9명의 총무원장 스님과 세 분의 종정예하를 모시기도 했어요.

- 종단 소임을 놓으시면서 경승단을 활성화 한 것으로 압니다.

= 1970년대 중반 경승이 없던 시절에 종단 소임을 보면서 당시 서울시 경찰국에 나가 법회를 주관했어요. 그것이 경승단의 모태인 셈입니다. 이후 경승단이 창단돼 초대 사무총장을 하기도 했고, 중앙 경승단장을 5년 동안 하기도 했어요. 현재도 30여년 동안 서울시 경승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군포교를 하는 군종교구처럼 경승이 주축이 되는 경승교구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군대포교보다도 어쩌면 더 중요한 게 경찰포교라는 생각도 듭니다.

- 경찰포교의 중요성을 경승교구로 연결하자는 말씀이네요.

= 일반인들에게 경찰은 군대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어요. 경찰이 더 필요하다는 거지요.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분들이 경찰이니까요. 전국 면단위까지 파출소가 있잖아요. 이들 단위마다 사찰이 있고, 지역 경찰을 대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경승이 배치돼 포교한다면 불교계의 대정부 관계는 좋아질 것이고 불교위상이 올라가고 결국 불교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 대학교를 나오셨는데 당시로는 드문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 당시에는 스님이 대학 다니는 것을 어른 스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운 좋게 장학금을 받으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전공을 살려 경전 번역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포교 역경 도제양성의 종단사업에서 역경부문이 열악했어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들도 알 수 있게 경전을 번역하고 싶었는데 그 길을 가지 못해 아쉬움도 있어요.

- 스님의 장학사업은 교계에 이름이 나 있는데 어떤 인연인가요.

= 앞서 말했듯이 대학을 장학금을 받고 다녀서 회향을 하는 차원이었어요. 1987년에 ‘금강사장학회’를 발족시켰는데 정부허가를 받은 재단법인이었어요. 처음에는 신문배달을 하는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어요. 점차 범위를 넓혀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생과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학생,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학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에게까지 장학금을 지급했어요. 소위 엘리트 학생들에게만 장학금을 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회지도층 양성을 위해 불교가 앞장선다는 차원이었지요. 그 학생들이 지금은 경찰서장, 검사 등 사회 지도층이 되어 다시 금강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 금강사를 유명한 태아영가 천도 도량으로 만들어 놓으셨어요.

= 이름 없는 도심 포교당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성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1976년으로 기억하는데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석차 일본사찰을 방문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천도재를 보게 됐어요. 그것이 낙태아천도재였어요. 귀국 후 낙태에 관한 여러 책을 읽고 생명존엄성을 알리기 위해 <어둠의 빛으로 떠난 태아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출간해 본격적인 태아영가 천도재를 올리기 시작했어요.

- 전국에서 많이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 봉행하는 태아영가천도 법회에 전국에서 동참하고 있습니다. 금강사는 법당 2층에 태아영가 천도를 위한 제불보전을 조성해 놓았어요. 이곳에는 과거7불과 삼천불조 53불, 현겁부처님 1000불과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를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 모셔와 봉안하고 있습니다. 이 불사는 20여년 동안 진행해 왔어요. 기도를 하러 오시는 불자들을 위해 편의시설도 갖추어 놓았어요.

- 단순히 태아영가 천도만 하는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 금강사에 한번 다녀간 불자들은 신심이 돈독해져서 돌아갑니다. 매일 기도하는 습관이 들도록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태아영가 천도법회를 동참하지만 이후에는 태아로 인해 신앙심이 돈독한 불자로 거듭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포교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 금강사가 지역포교에도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 사찰이 위치한 지명이 세심동산이라 불교와 친근합니다. 이곳에서 40여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사찰불사를 진행해 현재의 가람을 이룩했어요. 또 불자님들이 매주 참선을 할 수 있도록 ‘주말선방’도 운영하고 있지요. 매월 태아영가 천도법회도 봉행합니다. 자긍심을 갖는 것은 사찰 주지 부임후 지금까지 사찰회보(寺報)인 <금강법보>를 창간해 오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 담긴 문서포교를 해 온 셈입니다.

- 종단소임을 오랫동안 보셨는데 현재 우리 종단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 대체적으로는 안정되게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지금 우리 종단은 다양한 포교를 할 수 있는 재원 마련을 위한 방안이 만들어져 있지 않는 게 안타까워요. 예를 들어 생수사업이나 관광사업 등 종단 차원에서 일반회사와 협약을 맺어 재원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을 장기적으로 구상해 실행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종단에 묻혀 있어 발굴되지 않는 사업들이 많이 보입니다. 국립공원이나 사찰 유휴토지도 잘 활용해 전통을 살리면서 불교도 널리 알리고, 재원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 사찰운영에 대한 스님의 지론이 있다면요.

= 공찰이든 사설사암이든 그 나름대로의 전문화와 특성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금강사는 태아영가천도 도량으로 특성화 되어 있듯이 우리나라 모든 사찰은 저마다의 특성을 가져야 포교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전국의 모든 사찰이 저마다의 특성에 맞는 템플스테이를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철저하게 사찰 문을 열어야 포교도 할 수 있고 사찰운영도 원활해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 가슴에 새기는 부처님 가르침이 있나요.

= 안수정등(岸樹井藤)과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안수정등은 ‘강 기슭의 나무와 우물 속의 등나무’를 일컫는데 인간이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의 번뇌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지요. 그래서 열반의 세계는 영원하고 즐겁고 자재(自在)한 참된 자아가 확립되어 있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인 상락아정의 글귀를 항상 가슴에 새깁니다.

-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요.

= 수치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전국적으로 낙태아가 너무 많이 생깁니다. 이런 일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생명존중 사상에 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낙태한 어머니도 충분한 산후조리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이들을 위한 홍보와 대책마련을 해 보고 싶습니다. 곧 제가 쓴 책 <어둠의 빛으로 떠난 태아는 어디로 가는가> 개정판도 내고 내년 즈음에는 이런 문제를 주제로 한 세미나도 열어볼 계획입니다.  

■ 자우스님은 …

1963년 합천 해인사에서 경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 화상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양산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용주사 중앙선원의 전강스님과 망월사선원의 춘성스님 회상에서 안거했으며 전 전계대화상 성수스님으로부터 계맥을 이었다. 총무원장 비서실장을 비롯해 감찰국장, 조계종 중앙포교사, 기획실장, 포교부장, 재무부장, 초심 호계위원 등 종단소임을 두루 역임했다.

1980년 대한불교신문사(현 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불교신문사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6년 서울 금강사 주지로 부임해 지금까지 지역포교와 장학사업, 문서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해외 불교국가와 교류사업도 활발하게 펼쳐 몽골불교대학 명예 문학박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과도 교류하고 있다. 총무원장과 종정 스님으로부터 3차례 표창을 수상했으며 경찰청 경승실장으로 재직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불교신문2996호/2014년3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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