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안거 결제를 하고 벌써 세 달이 지나 오늘 해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올 여름은 유달리 더웠습니다. 물론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봄은 따뜻하고, 가을은 시원한 것이 당연하지만, 올 여름은 작년보다 더웠는데, 여러분 그동안 공부를 잘 하셨습니까?

‘몸이 건강하구나’ ‘마음도 편안하구나’ 하는 것은 그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얼굴이 심상치 않고 몸도 건강치 못할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나쁘고 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잘했느냐’ 또는 ‘잘하고 계십니까’ 할 때 ‘공부’란 도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물으면 대체로 “지금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오고가고 일상생활을 해왔다”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으면 걷기도 힘들고 거기에다 일까지 하려면 더 힘들 것입니다. 그 힘든 원인을 물으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짐은 무엇입니까? 만약 이때까지 모르고 짐을 들고 있었다면 한 생각 돌이켜서 그 짐을 내려놓았다 칩시다. 짐을 놓았을 때와 들고 있었을 때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한다고 이때까지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음이 안심하였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아직까지 마음속에 걸린 것이 있고 걱정이 있다면 일생생활에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근심 걱정하는 것을 두고 ‘당신은 무엇을 근심 걱정하고 있습니까’ 물으면, 그럴수록 아마 속으로 ‘공부를 잘해야 되겠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부를 잘해야겠다’ 할 때 도대체 ‘무슨 공부를 잘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출가하는데 ‘무상하고 신속한 속에서 생사해탈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애쓴 만큼 기약하던 목적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누구 할 것이 없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즉 생로병사 그 다음은 알기 어렵습니다. 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 될 텐데 어째서 생로병사가 되는가? 우리는 나자마자 한 시간 하루 1년 10년 100년 지나면, 처음에 태어났을 때와 모습이 같지 않습니다.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이것은 어떤 재주, 기술, 권력, 재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 있는데 아무리 똑똑하고 모든 것을 갖추었더라도 불과 100년도 되지 못하여 늙고 병들어 결국 몸을 하직하게 됩니다.

‘하직한다’는 것은 ‘몸을 떠난다’는 것이며, ‘몸을 떠난다’는 것은 몸 들어오기 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죽으면 몸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그것은 미래를 아직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다녀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이미 지내온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렇죠. 그렇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지금 육신 속에 머무르고 있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의문은 사람이라면 생각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 쯤은 고민해봤을 겁니다.

젊은 시절에야 아직 젊으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먼 이야기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지면 ‘어제까지 소년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럴 때 ‘아 그렇구나’ 결국 언젠가는 이 몸과 떠나야 하고,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선업을 지었으면 선업의 결과가 나에게 올 것이고, 내가 남을 위하여 착하고 좋은 일을 하지 못하고 나쁜 방법으로 괴롭혔다 즉 그렇게 악업을 지었다면 틀림없이 나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기에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을 때 ‘무엇을 했느냐’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는 ‘생사해탈’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됩니다. 생사해탈의 방법은 ‘마음 깨닫는 것’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하여 각기 배운 대로 수행합니다. 또는 법문도 듣고 여러 선지식도 찾고 자기 나름대로 잠도 안자고 애를 쓰고 그럽니다. 그런데 ‘마음 깨닫는다’ 할 때 도대체 마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끔 드리는 말씀이지만, 불교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부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있다고 하는데, 부처님이라 하면, 무엇을 부처님이라 하는지” 하고 궁금하여 어느 선사를 찾았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如何是佛)” 하고 선사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사의 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마음이 부처다(心是佛)” 그러자 그는 “예! 알았습니다” 하며 ‘마음이 부처님’인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부처가 뭐 따로 뭐 있는 줄 알았는데 마음을 부처라 하는구나”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무엇인지 몰랐던 무거운 짐을 선사의 일언지하에 보따리가 떨어지듯 의심이 풀려 홀가분하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부처를 찾았으나 마음을 부처라 하여 깨달았다” 하는데, 그러면 그 ‘마음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사를 찾았습니다.

“마음을 부처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선사에게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무엇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하는 고놈이 마음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그도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마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그거였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요즘의 말로 하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見聞覺知) 놈, 요것이 내 자신인줄 알고 마음인 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이상 뭐 알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是甚?)” 즉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놈은 어떻게 생겼느냐?”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공부가 수월한 텐데 모르니 지금 여러분이 공부하고 있잖아요. 또한 그렇게 여러분이 깊이깊이 생각하고 있잖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에 대하여 수없이 생각도 하고 수없이 법문도 듣고 수없이 염불도 했다면, 그렇게 공부했으면, 틀림없이 실마리를 잡고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즉 자기 혼자서 해결되지 않으면 선사의 법문을 다시 들어 보든지 해야 합니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본래 물 들은 데가 없다’ 그랬습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다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빠진 것 아무것도 없다. 다만 망연하면 즉 쓸데없는 생각 쓸데없는 짓을 안 하면, 곧 여여불이다. 여여불이란 과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절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이 말에 보면 마음이 본래 물드는 것이 없고 스스로 원만하다 하니 우리가 뭔가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래 깨닫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듣고도 깨달지 못하는 것은 뭔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 또 다른 선문에도 있습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다. 곧 ‘도는 어려운 것이 없다’ 입니다. 우리는 도를 깨닫기 위해 애를 쓰나 이렇게 어려운데,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은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좋다하여 취하고 어떤 것은 싫다하여 버리는 취사분별을 하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도(道)속에 있으면서도 도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 속에 있으면서. 도속에 있다고 할 때의 도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도를 진리라 하는데 무엇을 도라 합니까?

옛날 선사는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생사를 해결하였습니다. 부처님도 마음을 깨달아 생사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바로 ‘도를 깨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을 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깨달았다 할 때 이 마음을 어떻게 깨닫는다 말입니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어떤 화두를 들어 목표를 향하여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여 다른 공부와 일체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오로지 자기 목적한 곳을 알고자 하는 의심 하나로 나아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한번 해볼까?”, “좋으면 하고…”, “우리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칼을 뽑았다면 죽을 각오로 한바탕 해야 됩니다. 그렇듯이 이왕 머리 깎아 이 공부를 하고 있다면 절대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정말 우리가 지극정성의 일념으로 딴 생각하지 않으면 7일을 넘지 않고 깨닫는다고 그랬습니다. 7일을 넘지 않고 깨닫는 공부를 왜 1년씩 30년씩 틀어 앉습니까? 정말로 지극 정성으로 하려는 각오로 나름대로 해보지만, 아직도 뭔가 미진한 것이 있지 않나 싶어 여러 해 동안 선방에서 선방으로 다닙니다. 하고 또 하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도 왜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마음에 그렇습니다.

정말 자기가 알고자 하는 의심을 갖고 일념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일념이란 다른 생각이 끼일 곳이 없어서 일념으로 합이 되면, 일주일 넘지 않고 깨닫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 같으나 일념이 쉬운 일은 아니죠. 수고스럽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도 걸어 잠그고 일념으로 하다보면 뭔가 진척이 있습니다. (중략) 그래서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 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런 속에서 생활해나간다면 그것이 공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마음이 편안합니까?” 모자라는 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임제선사도 “너희들 대장부가 뭐가 모자라서 혼자 그렇게 몸부림 치고 있느냐. 배고플 때 배고픈 줄 알지, 더우면 더운 줄 알지 이것 빼 놓고 뭐가 있느냐” 했습니다.

‘옛날 조사 스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여차 여차 이렇게 설명하고 있을 때 이 소리 듣고 있는 그 놈을 확인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생사와 관계없다 하였습니다. 너희도 보고 있는데 왜 확인하지 않느냐? 만약 확인했다면 그 다음에는 행주좌와에 그 무엇도 관섭하지 못한다.

밖에 소리가 들리나 소리를 듣고 있는 놈은 소리가 아닙니다. 밖에 물체가 보이지만 보고 있는 놈은 물체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긴 물건입니다. 분명히 듣고 보고 있으나 찾아보면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분명 없구나 하겠지만, 똑똑히 알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래서 있다고도 할 수도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잡을 수 없으니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어서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 모습입니다.

[불교신문3227호/2016년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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