⑳ 청우경운

야학 농촌소비조합 결성해

일제강점기 주민 계몽에 ‘앞장’

왜색불교 타파 정화불사 참여

석전 스님 은법상좌 법맥 계승

 

○… “빗소리를 듣는다.” 스님의 법명 ‘청우(聽雨)’의 한글 풀이이다. 법명을 지어준 석전 박한영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이며 석학이었다. 석전스님은 1934년 음력 7월 청우스님에게 게송을 전하며 수행정진에 만전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 한문으로 된 입실게(入室偈)의 한글 풀이는 다음과 같다. “마음 땅에 그릇됨 없음이 자성의 계요, 마음 땅에 어지러움 없음이 자성의 정이며, 마음 땅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의 혜라, 이 세 가지 새지 않는 배움의 게(偈)는 육조께서 이르신 것이니, 나 또한 이같이 설하고자 하노라.” 1944년에는 석전스님에게 전법게를 받고 법맥을 이었다. 이때 석전스님의 전한 전법게의 한글 번역을 이렇다. “푸르른 버들가지 늘어진 제방도, 봄비 소리는 막지 못하네, 선심(禪心)은 별달리 말이 필요 없거니 앉아서 참 나를 만나면 될 뿐.”

○… 일제강점기 청년승려 청우스님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석전스님에게 입실(入室)한 1934년 당시 수원에 사는 이규재(李圭宰)라는 인물과 동맹기도문(同盟祈禱文)을 작성했다. ‘대원선방(大圓禪房) 석전(石顚) 강하(講下)’라는 구절로 보아 이규재는 대원사 불교전문강원에 재학하는 도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맹기도문의 한글 풀이를 소개한다. “두 사람 한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서원하고 기원합니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삼키어 나라는 무너지고 임금님은 돌아가셨으며, 의열지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였습니다. 마구 함부로 다스려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망명했던 사람 여럿이 속속 귀향해, 옛 나라를 회복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합니다. 중생들을 건지고 저희 번뇌 끊기를 지심으로 발원하오니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마하반야바라밀.”

○… 청우스님은 일제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함을 절감했다. 평남 순천 안국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에는 농민과 빈민의 자녀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개설했다. 또한 매주 두 차례 설교회(說敎會)를 열어 주민들에게 불교 가르침을 전하고 민족 현실 등에 눈을 뜨도록 계몽(啓蒙) 활동을 폈다. 이와함께 가난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부업과 저축을 장려하고 농촌소비조합을 결성하는 등 시대를 앞선 선구자의 역할을 다했다. 당시 스님의 이같은 활동은 일간지에 소개되는 등 반향이 컸다. 1936년 1월16일자 <조선일보>에는 ‘사원(寺院)을 교실 삼아 무산아(無産兒) 교육 진력, 안국사 주지 양경수 씨 열정’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양경수(楊景洙)는 스님의 속명으로, 당시 법명과 함께 사용했다.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사재를 희생하여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는 스님이 있다. 그는 현재 평남 순천군 사인면에 있는 안국사의 주지 양경수(楊景洙)씨로 … 무산아동의 문맹을 불쌍히 여겨 우선 야학을 개최하고 수십 명의 청소년에게 한글 산술 등 필요한 몇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 그는 넉넉지 못한 불전을 털어 학용품의 일체와 기타 비품대 등을 독담(獨擔, 홀로 부담)하여 가면서 ‘배워야 산다’란 슬로건 밑에서 열심 지도하고 있음으로 … 그의 장거와 투지에는 누구나 감사히 생각한다고 한다.”

○…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1950~60년대 정화불사를 통해 비구승이 인수한 후 사명(寺名)을 태고사에서 조계사로 변경했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는 한국불교를 상징하는 도량이었지만 정화불사 직후의 살림은 곤궁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4월 청우스님은 조계사 주지로 부임했다. 당시 조계사는 변변한 공양조차 힘들어 저녁에는 죽을 먹어야 했다. 공양간이나 해우소도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 대중이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이때 청우스님은 조계사 면모를 일신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1965년 1월 청우스님의 ‘불사모연문’에는 간절한 발원과 심정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불자된 우리들은 나라와 불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응분의 힘을 기우려 이번 불사를 성취해 주실 것을 시방 제현에게 고하니 여러분의 정성이 도량국내에 가득하기를 바라옵니다.” 청우스님의 호소에 청담, 관응, 대휘, 녹원, 금담, 서운, 탄허, 대의, 남곡, 월주, 구산, 벽암, 추담, 석정, 벽산, 혜공, 기원, 진완 스님과 신도들이 동참하여 조계사 도량을 정비할 수 있었다.

○…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한국불교의 청정성을 복원하기 위한 정화불사는 지난(至難)한 과정이었다. 법적 분쟁과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청담스님을 보좌하며 적극 참여한 청우스님은 정화불사의 명분을 우선하면서 한국불교 발전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25교구본사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은 “정화는 추진하되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취지로 포용 상생하려고 애를 많이 쓰신 것으로 안다”고 청우스님을 회고했다. 정화 당시 청우스님이 작성한 ‘종단시비 수습안’과 ‘종단분규 수습안’ 시안(試案)을 통해 원력을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은 “종단의 재건발전을 위해 좌기(左記) 각항을 실천하기로 한다”면서 △전국 사찰 쇄신 정비 △도제양성 및 지도인물 양성 목적으로 총림 설치 △대중불교 실천 위해 역경사업 단행 △교세 확장 위해 포교 전도사업 치중 등을 제안했다.

○… 1955년 10월 종정 석우(石友)스님으로부터 제3교구본사 건봉사 주지로 임명받은 청우스님은 단신(單身)으로 부임했다. 지금은 신흥사로 옮겼지만 당시는 건봉사가 제3교구본사였다. 한국전쟁으로 사실상 폐허가 된 건봉사를 대처승들에게 인수 받았지만 고충이 많았다. 사찰 재산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고, 상당수 토지가 미수복 지구에 있어 확인이 어려웠다. 이같은 어려움으로 대부분 건봉사 주지 소임을 사양했다. 그러나 주지로 부임한 청우스님은 1915년도 토지대장을 근거로 264만4628㎡(80여만 평)의 미수복지역의 사찰 땅을 확인해 등기를 마치는 등 난관을 딛고 삼보정재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1959년 8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도우회 창립 법회 후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청우스님.

■ 청우스님 수행이력

 

1912년 8월25일 평남 성천군 출생. 부친 양학선(楊學善) 선생,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속명 경수(景洙), 본관은 청주. 1923년 순창 구암사에서 석전스님을 은사로 출가. 1928년 평남 성천 동명학교, 1931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 수료. 1932년 안변 석왕사 불교전수강원, 1934년 개운사 대원불교전문강원 졸업. 1934년 7월 봉은사에서 보련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1935년 평남 평성 안국사 주지로 있으면서 야학(夜學) 개설, 주민 위한 소비조합 결성. 평양 영명사,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 유점사, 안변 석왕사, 장성 백양사에서 참선 수행.

1944년 석전스님에게 전법게 받고 법맥 계승. 1945년 한암스님에게 보광(寶光)이라는 호를 받음. 해방 후에는 동산, 청담, 금오, 지월스님과 정화불사 참여. 제3교구본사 건봉사 주지 취임, 탄허스님과 오대산 수도원과 상원사 봉찬회 결성. 총무원 총무부장, 대한불교신문사(현 불교신문) 편집위원장, 중앙종회의원, 제22교구본사 대흥사 주지 역임. 1971년 10월3일(음력 8월15일) 대흥사 동국선원에서 원적. 세수 60세, 법납 49세. 제자로 동성(東星), 재덕(在德), 도홍(道弘), 기산(其山), 도륜(道輪), 도열(道悅), 법진(法眞), 정암(靜庵), 법정(法政), 재원(在圓), 도훈(道薰), 정봉(正奉), 도수(道守) 스님 등이 있다.

 

 

 

■ 청우스님 어록

 

불상을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불상에 도가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이나 둘 다 아직 도(道)와는 십만 팔천리나 떨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말이나 형상에 휘둘리면 참된 도와는 자꾸만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매일 잠자고 일어날 때 부처님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면서도 부처를 찾아 끝없이 헤매는 게 중생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인줄을 의심 없이 믿고 또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도 될 수 있고 세상에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교는 알고보면 그렇게 어려운 종교가 아닐 뿐 아니라 종교 중에서도 가장 쉬운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핵심은 인연법이고 인연법의 요체는 바로 인과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가리켜 불교에서는 무상하기 짝이 없는 한바탕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속절없고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상이 그냥 허무하다는 한탄이나 세상을 등지고 살자는 취지를 가진 낱말은 결코 아닙니다. 무상을 제대로 알아야 시간의 소중함과 집착의 허상함을 깨닫게 됩니다.

[불교신문3227호/2016년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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