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정사 주지 원소스님

‘가야산 호랑이’ 16번째 상좌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생활

 

수행자는 게을러서는 안 된다

시간을 생명으로 생각하고

아껴쓰라는 유훈 가슴에 새겨

 

참선 대중화 위해 팔 걷어붙여

정오(正悟) 확산 위한 시민도량

정오선원 개원해 “함께 정진”

 

거창한 ‘깨달음 이야기’보다

아침·저녁 30분씩 참선 권유

지난 8월30일 서울 삼정사에서 만난 원소스님. 성철스님 아래서 공부한 스님은 “일상 속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싶다면 참선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소(圓昭)스님은 책벌레다. 지금까지 읽은 1800여 권 책의 제목과 요점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장편소설 위인전 사상서 불서 등등. 빛바랜 양면괘지에 적힌 도서목록의 시작은 1965년이다. 왜 중앙승가대에서 도서관장을 하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습관이다. 책을 읽고 화두를 드는 일 외의 나머지 시간은 한없이 비워둔다. 스님의 방안에는 달력 하나만 덜렁 걸려 있다. 비할 바 없이 깔끔하다. 당신의 좌우명은 ‘단순하게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의 16번째 상좌다. 박사논문도 은사 스님을 주제로 썼다. 서른이 다 되어 늦깎이로 출가했다. “돈 때문에 속이고 돈 때문에 굽실거려야 하는 직장인의 삶이 너무 싫었다.” 인연은 이미 무르익은 편이었다. “속가 집안 어른들이 오래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어렸을 때 스님들이 병이 들면 우리 집에 오셔서 몇 달씩 요양하시다 가실 정도였으니까요.”

1978년 해인사 큰절에 입산해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오늘날은 출가자 급감이 종단적인 고민이지만, 그때만 해도 해인사에서 머리를 깎는 출가자들이 차고 넘쳤다. 원소스님과 같은 기수 행자만 20명이었고, 스님이 행자반장을 맡았다. “해인사 여름수련회에 감동해, 내쳐 스님의 길을 걷겠다고 나서는 청년이 한해에만 87명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는 전언이다. 구도열의 중심엔 성철스님이 자리했다.

원소스님의 인생 역시 8할은 성철스님이 만들어줬다. 스님이 주석하던 백련암 스님 가운데 한 명이 방위병 복무를 위해 절을 떠나야 했다. 일손이 부족해 원소스님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처음 뵌 성철스님의 얼굴은 그야말로 ‘호랑이상’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고된 ‘시집살이’가 열렸다. 성철스님은 원소스님을 ‘키다리’라 부르며 으르고 가르쳤다. 해인사의 일상은 새벽 3시에 시작해 밤 9시에 끝났다. 성철스님은 대중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고 한 시간 늦게 잤다. 행동이 곧 교육이었다. 죽도록 혼나지만 않으면 그게 칭찬이었다. 아침예불을 두 번 빠졌다가, 백련암에서 두 번 쫓겨났다. 감자 껍질을 두껍게 깎다가 신도들의 시줏물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며 혼났고, 물건을 제자리에 반듯이 정리정돈하지 못한다고 혼났다.

“큰스님의 하루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와 빼닮았어요.” 시계 초침처럼 정확하고 규칙적이었다. 새벽2시에 일어나서 3시에 백팔참회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무염식(無鹽食)을 조금 했다. 물론 하루종일 간식이란 일체 없었다. 날마다 두 번 산책하고 채소밭과 정원수를 가꿨다. 3000배를 마친 신도와 공부를 점검받으러 오는 스님들을 접견하는 시간 외에는 참선과 독서로 소일했다. 누더기 두 벌을 50년 동안 손수 기워 입었다. 거처하는 방에는 부처님 사진 한 장과 경상(經床), 좌복이 전부였다. ‘속물을 빼기 어렵다’면서 신문과 TV와 라디오를 일절 금했다. “오직 불교신문만 보셨다.”

백련암에서 1년 동안의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기 며칠 전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승려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산하여 재가불자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망설였다. 심란한 마음으로 부엌에서 군불을 지피는데, 마침 옆을 지나던 성철스님이 쏘아붙였다. “인생일대사를 해결하는 승려생활처럼 보람있는 일은 없다. 우리들 인생 짧다. 쓸데없는 생각 말거래이.” 제자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원소스님은 자못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바로 성철스님의 상좌 가운데 최초로 강원(講院)에 입학했다. 앞서 밝혔듯 워낙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계를 받기 전 사형(師兄)인 원택스님(현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에게 강원에 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전까지는 백련암 행자들이 강원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계를 받고나면 2~3년간 성철스님이 내려준 경전과 조사어록 수십 권을 보며 자체적으로 공부한 뒤 전국의 선방을 찾아 떠나가는 것이 상례였다.

원택스님은 보름이 지나 은사 스님에게 원소스님의 의향을 알렸다. “신 행자가 강원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바로 가타부타 말씀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날따라 성철스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처음엔 ‘반대하시는구나…’ 여겨 뜻을 접으려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사형 스님이 저를 부르더니 강원에 갈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백련암의 ‘별종(別種)’이 된 것인데, 정말 뛸 듯이 기쁘더군요.”

가장 완벽한 소통은 ‘이심전심’이다. 무뚝뚝하고 무섭기만 했던 스승에게서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은 머지않아 책임감으로 돌아왔다. 대중을 통솔하는 방장(方丈)이었던 은사 스님에게 누가 될까 싶어 매사 조심조심하며 살았다. “숨 한 번 허투루 쉬지 않으려 노력했다.” 강원에 이어 율원을 졸업하고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대학원에서도 수학했다. 마침내 은사 스님의 삶을 조명한 ‘퇴옹성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이정표를 세웠다.

원소스님도 스승처럼 산다. “수행자는 절대 게을러서는 안 된다. 시간을 생명으로 생각하고 아껴 쓰라”는 유훈을 가슴에 새겼다. “젊어서는 재색(財色)을, 늙어서는 명예욕을 조심하라”는 말씀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일절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스스로는 철저히 낮추고 침묵하는 스님이지만, 주변의 문도들은 칭찬 일색이다. 원택스님은 “쌀 한 톨도 아껴 쓰는 분이 바로 원소스님”이라고 사제(師弟)를 추켜세웠다. 전 해인사 승가대학장 종묵스님 또한 “원소스님은 언제나 바른 길로만 뚜벅뚜벅 걸어온 분”이라고 말했다.

원소스님이 주지로 머무는 삼정사는 서울 정릉의 삼각산 산기슭에 자리했다. 풍광이 명산의 산사 못지않다. 서울시내에서 보기 드문 쉼터이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원래 사형인 삼밀스님이 창건한 가람이었으나, 스님이 갑자기 입적하면서 친족들이 상속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를 해결할 문중의 대표로 원소스님이 지목됐다. 대법원까지 가는 6년 소송 끝에 기어이 삼보정재의 유실을 막아냈다.

“참선 잘 하거래이.” 성철스님의 단출한 유언이다. 지난 8월21일 삼정사에 정오선원을 개원한 원소스님은 참선의 대중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은사가 줄곧 강조했던 ‘정오(正悟)’의 확산을 위한 시민참선도량이다. 1층에 공양간, 2층에 차담실을 비롯한 방사, 3층은 선방으로 구성돼 있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정진하고 숙식할 수 있다. 선방은 좋은 기(氣)를 모을 수 있는 피라미드 구조이며, 삼밀스님이 태국의 장군에게서 기증받은 남방불교식 불상이 이채롭다.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 주간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야간엔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30분까지 화두를 든다. “무엇을 가르쳐주느냐”고 묻자 스님은 “함께 정진할 뿐”이라며 몸을 낮췄다. 그래도 내공은 감추기 어렵다. “거창한 깨달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아침에 30분, 저녁에 30분씩 참선을 해보십시오. 적게 먹고 적게 말하고 적게 만나게 됩니다. 가장 단순한 삶이 가장 완벽한 삶입니다.” 마음만 쉴 수 있다면, 지옥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법이다.

■ 원소스님은…

 

1978년 성철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1980년 구족계를 수지하고 1982년 해인사승가대학을, 1983년 해인사 율원을 졸업했다. 1998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2008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해인사 용주사 봉암사 수도암 남산사 등에서 안거를 지냈고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중앙승가대 수행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 삼정사 주지이며 중앙승가대 도서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3232호/2016년9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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