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전통과 문화를 대변한다면

서울은 도시화만을

떠올리게 할 뿐

천년의 향기에 어울리는

도시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 문화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잃어버리기 전에 신중하고

보다 한국적인 가치에 주목하는

성숙한 자세를 갖길 바란다

우리나라에서 ‘천년고도’라고 하면 단연 경주가 떠오른다. 경주는 기원전 57년에서 935년까지 무려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주와 필적할만한 천년도읍이 우리에게는 한 곳 더 있다. 너무 가깝게 있기에 잊고 지내는 문화의 도시, 그곳은 바로 서울이다. 서울은 한성백제시대(기원전18∼475년)와 조선조(1392∼1910) 그리고 현대까지 더하면, 무려 1117년간이나 수도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찬란한 도시이다. 그러나 경주가 전통과 문화를 대변한다면 서울은 도시화만을 떠올리게 할 뿐 천년의 향기에 어울리는 도시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 선진사회에서는 문화가 곧 무기이며, 문화력의 증대야말로 곧장 국력으로 직결된다. 그러므로 문화의 이미지를 가꾸고 재가공해 내는 것은, 시민의 자긍심과 도시의 브랜드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사업인 것이다. 파리나 런던이 갖는 명품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얼마 전 남산에 곤돌라를 설치하는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박원순 시장의 공약사업이기도 한 서울 도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란다. 서울 도성은 대한제국의 몰락 및 현대 서울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이미 상당부분이 훼손됐다. 이것을 수원 화성처럼 새롭게 복원하면서 추진해 가는 것이, 바로 서울 도성의 세계유산 등재 프로젝트다.

서울에는, 서울이라는 명칭이 있기도 전인 794년에 창건된 사찰이 있다. 이 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선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 됐고, 또 스님들의 과거시험인 승과가 치러진 장소이기도 했다. 바로 봉은사로, 문정왕후와 허응당 보우에 의해서 불교중흥의 불꽃이 타올랐던 곳이다. 이런 결과가 바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라는 나라를 구한 명승의 출현이다.

이런 봉은사가 현재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1970년 상공부 및 산하기관 10곳을 이전하겠다는 국가발전계획을 진행했고, 조계종은 국가를 위한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사찰 토지를 매각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사찰 토지는 문중 땅과 같아서 쉽게 매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당시 정부는 국가발전이라는 명분하에 봉은사의 토지를 거저 매입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대대적인 이전은 없었고, 이곳에는 오직 한전만이 들어섰을 뿐이다.

이 한전부지가 최근 현대자동차에 10조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매각됐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 서울시는 105층에 달하는 마천루를 승인해 주려고 하고 있다. 롯데가 1995년부터 2009년까지 갖은 우여곡절 끝에서야 허가를 받은, 제2롯데월드 급의 초고층 사업이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봉은사는 마천루의 그늘에 가려지는 어둠의 문화유산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국가를 위한 헌신의 결과치고는 너무도 가혹하고 수긍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도 서울시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며, 또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복원된 숭례문이 원래의 숭례문일 수 없는 것처럼, 복원된 도성도 진정한 의미의 도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존되고 있는 봉은사는 경시하고, 외침 한 번 막지 못하고 사라진 성벽은 중히 여기는 박원순 시장의 문화의식이 못내 아쉽다.

진정 문화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잃어버리기 전에 신중하고 보다 한국적인 가치에 주목하는 성숙한 자세를 갖길 바란다.

[불교신문3232호/2016년9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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