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현작가 ‘수요문학광장’서 불교와 인연 소개

희곡작가 언론인 주부 삶과 작품세계 들려줘

불교신문 김숙현(73) 논설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희곡작가이다.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 <바이올렛 왈츠> <새는 동굴에서 울지 않는다> <외줄 위의 분장사> 등 많은 희곡집을 낸 중견 작가이다.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10년 넘게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김숙현위원은 고승들과도 인연이 깊다. 대표적인 분이 법정스님이다. 1968년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김숙현 위원이 첫발을 디딘 직장은 불교신문이었다. 그 때 불교신문 주필이 법정스님이었다. 그 인연이 김숙현 위원을 희곡작가와 함께 대표적인 불교저널리스트로 알려지게 된 인연이다.


김숙현 위원이 ‘문학의 집 서울’이 주최하는 수요문학광장 ‘이 작가를 말한다’ 68번 째 초청작가로 선정돼 독자들과 만났다. 지난 9월21일 오후 서울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문학의 집·서울’에는 김위원의 글을 좋아하는 팬과 가족 친지 친구들이 함께 했다. 문학계 후배로 극작가인 한서대 유진월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작가의 작품 세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으로 참가한 경험, 가정일과 육아를 병행해야하는 여류 작가의 어려움 등 문학과 주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 중 법정스님과 인연을 비롯한 불교 인연이 청중들의 이목을 많이 끌었다. 유명 여류 작가 중에서 불교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과 주제를 다룬 문학이나 에세이가 거의 없는 한국 문학 풍토에서 김숙현 위원의 불교 글쓰기는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숙현위원은 이 날 불교 인연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불교신문에 들어갔는데 법정스님이 주필로 계셨다. 사랑도 많이 받았다. 봉은사에 원고 받으러 가면 반갑게 맞아주셨다. 영화도 보여주셨는데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를 법정스님과 함께 보았다. 클래식도 들려주셨는데 스님도 이렇게 멋지게 사는 분이 있구나 생각했다” 김위원은 법정스님으로부터 대련화(大蓮華)라는 법명을 받고 최초의 유발상좌가 된 사연도 들려주었다. “손위 시누가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늘 함께 법정스님을 친견 했다. 어느 날 계를 준다고 하길래 아들 둘을 낳아 먼 뚝섬 까지 가기 귀찮은데다 택시비도 만만치 않아 시누에게 가는 김에 내 것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법정스님이 그 말을 듣고 ”바느질 품삯이 아니니 와서 받아 가라“고 해서 뚝섬으로 갔다. 평소에는 편한 복장에다 자유롭게 대하던 법정스님이 정색을 하고 가사 장삼을 수하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중생은 업력에 의해서 내생에 태어나고 보살은 원력에 의해서 태어나는데 너는 다음 생애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으냐’. 그리고는 무릎을 꿇게 하고 5계를 직접 쓰서 일일이 설명했다.”

그 때가 1975년 이었다. 법정스님이 상좌를 받기 전이었다. 김숙현과 올캐는 그래서 법정스님의 첫 유발상좌가 되었다. 김위원은 ”그 이후 50여년 간 정진하듯 희곡을 썼다“고 말했다. 김위원은 동국대 재학 중에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불교학 개론 시간에 팔고(八苦)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생노병사 사고(四苦)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하는 고통(愛別離苦),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몸이 가져다 주는 어찌할 수없는 고통(五陰盛苦)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생노병사는 아직 젊어서 와 닿지 않았던 반면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등의 고통은 젊은 나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다“
김숙현 위원은 결혼 후 신문사를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 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며 산다. 법정스님, 지관스님, 일타스님 등 해인사의 스님들은 부산에 내려가면 좁은 김숙현 위원의 신혼 방에서 자고 가곤 했다.

김숙현 위원의 불교인연이 특별한 것은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김위원은 1969년 청마 유치진 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20대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해서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삶의 진실을 그려내는 작업을 해왔다. 유진월 교수는 “김숙현 작가는 거창한 인물보다는 나 우리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상처와 고통에 더 애정 어린 시선을 기울여 왔다. 김작가는 이미 등단 초기부터 여성들의 삶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그 본질적 의미를 천착하는 작가로서의 통찰과 선진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평했다. 희곡작가로서 김위원이 차지하는 문단 내 비중이나 후배들로부터 받는 평가가 남다르기에 김위원의 문학세계와 한 몸인 불교도 함께 주목을 받는 것이다. 김위원의 문학 수준이나 세계관이 작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불교 역시 문단평론가나 후배들로부터 아무런 눈길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김숙현 위원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저널리스트다. 결혼 후 부산에서 가정주부로 살던 김위원에게 부산일보는 논설위원을 제안했다. 기자 출신이 아닌 외부에서 논설위원을 특채한 것은 당시 부산일보 44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90년부터 12년간 논설위원을 지내며 불교를 비롯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칼럼의 써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2001년 칼럼을 묶어 ‘가슴에 폭탄을 품은 여자들’을 책으로 냈다. 논설위원을 지내며 보수적인 부산에서 영화제를 적극 지지해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김위원은 “영화제가 열리면 어느 날 은 10편 까지 보며 좋아하는 영화를 마음 껏 감상했다”고 말했다. 천편이 넘게 본 영화를 간추려 지난해 ‘삶 운데 영화가 있었다’를 펴냈다. 김위원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영화 주인공에 묻어서 말했다”며 웃었다.
 

이 날 경주에서 문학 대회가 열려 많은 문인들이 경주로 내려가 주최 측은 행사장이 텅 빌 까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홀은 팬과 인연 있는 사람들로 꽉 차고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김위원은 끝으로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이제는 펼치기 보다 내실을 기하는 나이”라며 “이런 저런 이유로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재일교포 청년의 삶과 고뇌를 다룬 ‘얼어붙은 입’(희곡집 ‘새는 동굴에서 울지 않는다’에 수록)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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