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꽃 피기전 

김형미 지음/ 시인동네

 

“나는 그때 눈 위를 걷고 있었지/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깊은 명을 재촉하던 그 흰 발자국은/ 내 것이었을까/ 하루 한끼 송홧가루를 떡으로 빚어먹던/ 네 큰 귀였을까 아니며/ 사는 일이 지독히 외로웠을/ 윤회하지 않는 길이었을까.”(‘발자국’ 전문)

김형미 시인이 펴낸 두 번째 시집 <오동꽃 피기 전>에는 전형적인 여류시인의 감성이 담겨 있다. 원광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문학사상> 신인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시인이면서 불교가 좋아 템플스테이 실무자로, 현재는 한 사찰의 종무실장으로 있는 김형미 시인의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어떤 길이 맞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또 시어가 잘 정돈돼 있어, 읽는 독자를 편안하게 시세계로 유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선운사 절문 앞에 늦도록 앉아 있었네/ 꽃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네/ 죽음이 이미 와 있는 방문 앞보다/ 더 깊고 짙은 어딘다를 향하고 있는 꽃들/ 동백을 홀로 바라본다는 일은,/ 큰 산 하나 허물어져 내릴 만큼 고독한 일/ 어쩌면 기억도 아득한 전생에서부터/ 늑골 웅숭깊도록 나는 외로웠네…”(‘선운사 동백숲’ 중)

선운사 동백이 꽃을 떨어뜨리기 직전, 작가는 숲에서 동백이 향한 곳을 바라다 본다. 땅이고 죽음이고, 윤회의 세계다.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의 전환은 삶과 죽음의 형이상학적인 인식을 지렛대 삼아 어떻게든 고통스러운 과거에 속박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로 보인다”고 평했다.

이 시집에서 작가는 또 짧지만 선어(禪語)처럼 많은 의미를 담은 시도 다수 발표했다. “오래된 짐승의 터럭 냄새가 난다”(‘안개’ 전문) “꼬박 열흘 동안 물을 주지 않았다// 오래됨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위태하지는 않겠기에”(‘국화’ 전문) 등의 시는 자연물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함축된 언어다. ‘여류시인의 시가 이런 멋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시집이다.

[불교신문3235호/2016년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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