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관 후보자가 연간 생활비로 5억 원을 쓴단다. 공식석상에서 용처를 묻는 질문에 그는 “주위사람들을 돕다보니 지출규모가 컸노라”고 밝혔다.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현금을 손에 쥐어주었던가 보았다. 하긴 자본주의에서 논란거리가 되겠나. 제 돈 제가 쓰겠다는데. 물론 정당한 방법으로 올린 수입이었다는 전제가 필요한 일이다. 공직자가 아니라면 가십거리나 될까. 재벌들의 수입과 씀씀이에 비하면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강남 아파트 분양권이 당첨되는 순간에 프리미엄만으로 1억을 벌었다는 사람이 속출하는 마당에 말이다. 돈이 돈 같지 않은 시절에 북에서 의사였던 탈북자는 일용직으로 나섰다. 당장의 생계가 급했고 두고 온 가족의 치료비와 생활비가 그의 가늘어진 목을 조였다. 그리고 빌딩청소를 하다 죽음으로 추락했다.

그 장관 후보자가 탈북의사보다 더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할 자신이 내겐 없다. 공직자는 이 땅의 청소년이 닮고 싶은 모델이며 공동체사회의 귀감이다. 세금을 걷어 급여와 활동비를 대주고 그들에게 권력을 허락한 이유다. 서민이 위화감과 열패감, 그리고 상대적 빈곤을 느껴가며 자신이 ‘개, 돼지’인지 거울을 보며 매일같이 점검해야 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제왕적 독재국가거나 정신병동이다.

출세 못한 글쟁이의 괜한 질투라고 핀잔을 주실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처럼 느끼는 분들을 위해 자위라도 하련다. 아무리 부자라도 구두 두 켤레를 동시에 신을 수는 없다. 어느 재벌도 두 개의 침대에서 잠을 자진 못한다. 내가 하루에 여섯 끼를 먹을 수 없다는 데 감사한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면 남과 비교되는 상대적 빈곤만이 극복 대상이다. 우리는 자주 상대적 박탈감을 절대적 빈곤과 혼동하며 자신을 괴롭힌다. 강대국의 수상한 압력과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한국인은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누리고 있다. 주말마다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된다. 나는 그 길고 넓은 도로들이 모두 고위공직자와 재벌들의 자가용만으로 채워진다고 믿지 않는다.

며칠 전 더위를 식혀볼까 하여 청계산 계곡을 찾았다. 셀 수 없는 숫자의 자가용들이 진입로부터 늘어서있고 쓰레기 천지였다. 나는 그 산과 계곡이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에 크게 감사했다. 그 귀한 땅을 거저 준대도 나는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외로 꼬며 절집으로 올랐다. 나는 깊은 숨을 뱉어내며 맑은 가난을 되새김질 했다.

[불교신문3235호/2016년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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