㉒ 이산도광

외호보살 인욕보살 ‘정평’

교구본사주지 6차례 역임

불교정화불사 적극 참여도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 도광스님.

○… 도광스님은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청정승가 복원을 위한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은사 동헌스님과 사숙인 동산스님을 가까이 모시며 정화불사 완수를 위해 기꺼이 나섰다. 1954년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 참석하고, 불교정화 선언문에 서명하는 등 도광스님의 공은 매우 크다. 정화운동에 참여한 대중 외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도광스님은 도천, 명선, 종산스님, 그리고 신도들과 함께 쌀, 채소, 고구마, 감자 등을 대형 버스에 싣고 상경해 정화불사에 참여한 대중에게 공양을 제공했다. 또한 나주 다보사 대중에게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설명해 동참을 이끌어 냈다.

○… 도광스님은 은사 동헌스님은 물론 사숙인 동산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성품을 지닌 도광스님의 수행과 정진력을 높이 평가한 동산스님은 “도광은 외호보살(外護菩薩)이며 인욕보살(忍辱菩薩)”이라고 각별히 아꼈다. 동산스님이 조실로 있는 범어사에서 원주 소임을 보았고, 한국전쟁 당시 범어사에서 열린 무차선회(無遮禪會)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헌신했다. 이 또한 동산스님과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다. 동산스님이 노년에 주로 당진 만덕사에 주석했는데, 당시 주지가 도광스님이었다. 이 무렵 동산스님은 대중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도광 수좌가 최고야, 여기(만덕사) 와서 보니 너무 좋고, 도광 수좌도 있으니 여기를 열반지로 삼아야겠어.” 동산스님은 만덕사에서 3년 6개월 정도 머물렀다.

○… 도광스님은 홍법, 일타, 광덕, 서정, 도견, 성수스님 등과 함께 청맥회(靑脈會)를 결성했다. 서로 탁마하며 수행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청맥회는 청정수행 가풍을 진작시켰다. 청맥회 설립 이유는 청맥회 ‘정기회기(定期會記)’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우리 청맥(靑脈)은 청백가풍(淸白家風)이라, 즉사즉리(卽事卽里)하였으니 선(禪)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교(敎)도 율(律)도 그리고 온갖 사판(事判)을 망라(網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본분은 언제나 푸르게 살아있는 생명의 황금나무인 것이다. … 이러한 순수성을 살려 서로가 탁마(琢磨)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 제백사(除百事)하고 회동(會同)하는 것이다.” 종열스님은 “청맥회는 종단의 귀감이 되는 대표적인 결사단체로 종단의 맥을 이어간 주역들이었다”고 평했다.

○… 수행자의 위의를 지키며 정진한 도광스님은 도반과 후학들이 지남(指南)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일타스님은 생전에 “도광스님은 꼿꼿하신 분으로 언제 어디서나 흔들림 없이 당당하신 분”이라면서 “언제 뵈도 존경심이 나는 분”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광덕스님도 “지계청정하시어 대중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을 만큼 그렇게 열심히 자기수행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녹원스님은 “여법한 수행승으로 살다간 도광스님은 우리 모두의 귀감(龜鑑)이었다”고 했다.

○… 은사에 대한 도광스님의 효심(孝心)은 지극했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은사 동헌스님에게 문안 인사를 빼놓지 않았으며, 무릎 꿇고 앉아 은사의 말씀을 경청했다. 혹시 바깥 출입을 하게 될 경우에는 미리 은사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고 한다. 동헌스님은 후학들에게 “너희 스님은 어디 내놔도 중이야. 변함이 없다”면서 “항상 꾸밈없이 정진하는 사람이 너의 스님”이라고 칭찬했다.

1964년 기축년 하안거 해제 기념 사진.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도천, 전강, 도광, 명선스님.

 

평생도반 도광·도천스님, 탑은 하나 비는 각각

구례 화엄사, 도천스님 부도비 제막

제19교구본사 화엄사(주지 영관스님)는 지난 23일 경내 각황전과 부도전에서 ‘이산당 도광대선사·도천당 도천대선사 추모재 및 도천대선사 부도비 제막식’을 봉행했다. 도광스님 32주기와 도천스님 5주기를 맞아 열린 이날 추모재에는 도광·도천 문도회 스님과 불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재에 앞서 도철스님은 행장소개에서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은 생전에 구도열정을 함께 나눴던 돈독한 도반으로 평생 상좌를 구분하지 않고 교육시키고 일불제자로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헌화, 헌다에 이어 화엄문도회 문장 명성스님은 문도를 대표해 “오늘은 도천스님 부도비 제막과 효대 적멸보궁 상량식을 하는 뜻 깊은 날”이라며 “화엄사 창건주 연기조사와 도광·도천스님의 효 정신을 이어 화합해 본래 출가목적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자”고 강조했다.

이어 주지 영관스님도 인사말에서 “도광대선사의 가람중흥과 도천대선사의 수행정신으로 화엄종찰의 기반을 세웠다”고 회고하고 “도광·도천대선사가 남긴 덕화와 감화력이 계속 이어지도록 화엄문손 모두는 가행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대중들은 부도전으로 옮겨 도천스님 부도비를 제막했다. 부도비 건립 불사 도감 원묵스님(화엄사 성보박물관장)은 경과보고에서 “도천스님 부도비는 고달사지 원종대사비를 모델로 했으며 4800자에 이르는 비문은 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스님, 조각은 무형문화재 120호 이재순 석장, 글씨는 한얼 이종선 선생이 썼다”고 소개했다. 도광·도천스님 추모재를 마치고 화엄문도 사부대중은 효대에서 적멸보궁 상량식을 봉행했다.

한편 화엄사 양대 문중인 도광·도천 문도회는 지난 2011년 도천스님 열반후 평생도반이었던 도광·도천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문도들의 화합을 위해 부도탑은 하나로 하고, 부도비는 별도로 제작하기로 했다. 화엄문도들은 도광스님 부도탑에 도천스님 유골을 함께 봉안하고 이번에 도천스님 부도비를 제막했다.

■ 도광스님 수행이력 

1922년 3월7일(음력) 전남 담양 출생. 속명 김오남(金午南), 법명 도광(導光), 법호 이산(山). 1937년(16세) 서울 대각사에서 출가. 은사 동헌(東軒)스님. 1938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에게 사미계 수지, 1939년 사집과정 수료, 1942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에게 비구계 수지. 1942년~1944년 금강산 표훈사(마하연)에서 정진. 1945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사교과 수료, 1945년 후반 은사 동헌스님과 남하(南下). 다보사, 범어사, 백양사,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 1953년 담양 보광선원 창건. 1954년 교단 정화운동 참여 종단 호지(護持)하고 정법(正法) 선양. 보광사, 범어사, 파계사, 용주사, 해인사, 화엄사 주지. 1~3대 중앙종회의원, 호계위원 역임. 1976년 동남아, 인도 불적(佛蹟) 성지 순례. 1980년 화엄사 주지 재임. 1984년 9월19일(양력) 입적. 세수 63세, 법납 47세. 

■ 도광스님 어록 

“불사도 중요하지. 그러나 불교중흥을 성취하는 길은 무엇보다 수행자가 더 많이 나와야 돼. 사바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수행자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 1983년 6월 <불교신문> 대담에서 

“출가 본의(本意)가 무엇이냐. 중이 된 목적이 무어냐.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이 몸 있을 때 열심히 (수행정진)해야 한다. 처음 (절집에) 들어왔을 때의 마음을 갖고 방심하지 말라. … 일미칠근(一米七斤, 쌀 한톨의 무게가 7근)과 부처님 공부 잘하면 아무리 깊은 업장(業障)을 지었더라도 5, 6월 눈 녹듯이 녹아버린다.”- 상좌들에게 늘 당부한 가르침 

“항상 일체법 불생(不生)하고, 일체법 불멸(不滅)이라. 시법(是法)이 주법위(住法位)하여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라.” - 스님이 평소 즐겨 읊던 경구

 자비에는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항상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늘 후학(後學)을 경계합니다. 인욕자비(忍辱慈悲)로 하심공경(下心恭敬)하면 그 어떠한 악함도 선함으로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불교신문> 인터뷰에서

[불교신문3235호/2016년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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