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는 못해도 마음의 옷 벗고 불법(佛法)에 의지하겠다”

조선 독립 염원한 황실 인사

상해 임시정부 망명 시도 ‘좌절’

만공스님과 각별…거문고 선물

한국전쟁 당시 부산 법륜사 피난

사진 왼쪽부터 대한제국시절 정복을 입은 의친왕. 1900년경 의화군 시절의 의친왕. 1950년대 초반 노년의 의친왕.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경기도 양주 홍릉과 유릉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지낸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후들이 안장되어 있다. 홍유릉 밖에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그의 동생 의친왕, 덕혜옹주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홍유릉(洪裕陵) 담장 밖에 위치한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의 묘소는 망국의 한을 지닌 대한제국 황실의 서글픈 현주소다. 

의친왕은 1877년 음력 3월30일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인 1891년 의화군으로 봉해졌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인 1900년에는 의친왕에 책봉됐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고종이 황제에 등극한 뒤 왕(王)의 칭호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일제를 비롯한 러시아와 청나라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의 명운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고종의 명을 받아 미국 유학(1899년~1905년) 길에 올라 선진문명의 견문을 넓힌 의친왕은 ‘자주독립국가’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1905년 귀국 후에는 황실의 명을 받아 대한제국 육군부장과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며 강성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낙심과 절망도 컸지만, 황실의 일원으로서 의친왕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목적으로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한일강제병합)이후 의친왕은 지사(志士)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을 시도한 것도 일제의 강점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주 홍유릉 인근에 있는 의친왕 묘소.

의친왕의 상해 망명 시도는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독립운동가 함태영(咸台永)은 1954년 2월27일자 <경향신문>에 ‘3·1운동 회고’라는 글을 통해 의친왕 망명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기미년 6, 7월 경에 혁명가인 전협(全協)씨가 의친왕을 상해로 모셔 일을 또 꾸며보려고 했을 때 정(정운복)이 원조한다고 같이 모사하였으나, 전협씨는 미리 정이 악독한 정탐자임을 잘 알기에 거사시에는 모의하던 장소에서 정에게 술을 만취시키고 결박한 뒤에 상해로 도주하였으나 정이 깨어나서 고발하는 바람에 신의주에서 체포당하여 이강(의친왕을 지칭)공은 공작 직을 삭작(削爵, 박탈) 당하고 전협씨는 7년, 최익환씨는 3년 징역을 당하였다. 그런데 악독한 정운복도 후에 일경에 잡혀 죽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세상에 고약한 짓을 하는 놈들은 자기 명에 죽지 못하는 법이다.”

다음과 같은 증언도 있다. “3·1운동 당시에 전협, 최익환 등의 주선으로 상해임시 정부로 모시고 간다면 우리의 운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여 그에게 탈출을 권고하였던 바 그는 쾌히 승낙하여 모든 준비를 하는 중에 상당한 시일을 요하게 되어 필경은 일인 경찰에 알려진바 되어 국경까지는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안동현 경찰에서 검거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된 후에는 그들의 감시가 엄밀하여 소정의 목적을 달(達)치 못하고 말았다.” 안동현은 지금의 중국 단둥이다.

상인으로 변장한 의친왕은 일행들과 남대문역에서 3등 열차를 타고 만주로 향했다. 떠나기 전 동지들과 술잔을 나누며 “나는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게 결의했다. 하지만 단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단둥역에서 일본 경관이 정중하게 경례를 하면서 “당신이 이강 전하요”라고 물었다. 일이 틀어졌음을 알아챈 의친왕은 “내가 이강이다”라고 답한 후에 입을 굳게 닫았다.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 간부들과 선이 닿은 의친왕이 비밀리에 상해 망명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이때 의친왕의 상해 망명이 성공했다면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의친왕이 만공스님에게 선물한 거문고. 지금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에 보존되어 있다.

의친왕의 상해 망명 시도와 관련해 숨겨진 일화 하나. 전협, 최익환 등 대동단은 황족 대표로 의친왕을 교섭한 결과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탈출 방법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비행기를 구입해 북악산에서 상해로 이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의친왕은 불교와도 인연이 깊다. 특히 근대를 대표하는 선지식인 만공(滿空, 1871~1946)스님과 각별했다. 만공스님과 여섯 살 차이의 의친왕은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덕숭총림 수덕사 근역성보관(관장 정암스님)에는 의친왕이 만공스님에게 정표(情表)로 전한 거문고가 소장되어 있다. 거문고 뒤에는 조선 후기의 이조묵(李祖默)이 1837년에 쓴 찬문(撰文)이 적혀 있다. 거문고의 본래 주인은 고려시대 공민왕으로 길재(吉再)에게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길재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 왕실의 보물로 전승되어오다 대원군이 소장했다고 한다. 그 후 의친왕이 보관했고, 1930년대 경 만공스님을 만나 신표로 건넸다고 한다. 1930년대 운현궁에 머물던 의친왕을 찾아온 만공스님과 문답을 통해 감화받은 의친왕은 “내가 비록 출가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의 옷을 벗고 불법(佛法)에 의지하겠다”며 거문고를 전했다고 한다. 이때 만공스님은 은사인 경허스님에게 물려 받은 염주를 의친왕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야기는 소설가 최인호의 <길 없는 길>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길 없는 길>의 일부를 인용한다. “시종의 손을 통해 거문고를 밖으로 보낸 의친왕은 그 후 단 한번도 만공스님을 만나지 못했고, 단 한번의 사제의 예를 맺고 불교에 귀의한 의친왕과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만공은 1946년에 이 세상을 떠났고 의친왕은 그로부터 거의 10년 뒤인 1955년에 죽었다. 만공은 이것을 거둬 들고 덕숭산으로 돌아가 산중턱 소림초당(小林草堂)이란 암자를 세우고 벽에 거문고를 걸어두고 한적할 때마다 거문고를 퉁기면서 법곡(法曲)을 타고 하였다.”

항일정신을 지니고 있던 의친왕과의 인연은 만공스님도 조선 독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지난 9월 덕숭총림 수덕사(주지 정묵스님)에서 열린 만공대선사 학술대회에서 노비구니 수연스님(90세)은 “우리 (만공)스님이 만해스님에게 독립자금이 든 돈 봉투를 건네는 것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면서 “이런 말 누구한테 하면 절대 안된다고 조심스럽게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만공대선사 학술대회에서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는 “만공스님은 아버님인 의친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면서 “만공스님과 의친왕은 너무나 뜻이 맞으셨다”고 증언했다. 의친왕이 만공스님에게 받은 법명은 만오(晩悟)로 알려져 있다. 법명이 ‘만호’ 였다고도 하는데, 만오가 맞는 듯하다. 황실 토지인 덕숭산도 의친왕이 수덕사에 시주했다고 이석 총재는 전했다. 

일제강점기 엄중한 감시를 받았던 의친왕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웅지(雄志)를 펼 수는 없었다.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과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발발후 더욱 어려움에 처했다. 1·4 후퇴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간 의친왕은 범어사 동래포교당(지금의 법륜사)에 머물렀다. 본래 형수인 순정효황후가 포교당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의친왕이 부산에 온 후에 구포로 옮겼다.

의친왕이 혼례를 올리고, 노년을 보낸 안동별궁의 1930년대 중반 모습. 지금의 풍문여고이다. 

서울 수복 후 상경한 의친왕이 주로 지낸 안동별궁(安東別宮)은 지금의 풍문여고 뒤의 모퉁이에 있었다. 풍문여고는 조계사와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의친왕은 1955년 8월16일 새벽4시17분 서울시 안국동 175번지 별궁에서 향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가톨릭에 입교했다. 

구한말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통(大統) 계승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고, 상해 망명을 시도한 후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던 의친왕.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였다.

[불교신문3239호/2016년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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