㉔ 퇴옹성철

‘불법대로 살자’ 봉암사 결사 

애민자비 실천 중요성 강조

대학생 불자 양성에도 ‘관심’

성철스님.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전한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 1912~1993) 스님. 조계종 종정을 두 차례 역임하며 후학들을 인도하고 세간에 불법(佛法)을 전한 성철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는 20일 해인총림 해인사에서 열리는 열반 23주기 추모법회를 앞두고 성철스님의 수행 일화와 가르침을 돌아본다. 

○… 성철스님의 노스님은 용성(龍城, 1864~1940)스님이다. 1937년 스물여섯 살의 성철스님은 범어사 원효암에서 용성스님을 시봉했다. 당시 용성스님은 모든 스님을 호칭할 때 ‘선생(先生)’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독 손상좌인 성철스님에게만 수좌(首座) 또는 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에 앞서 1936년 11월18일(음력 10월6일) 용성스님이 동산(東山, 1890~1965)스님에게 계맥(戒脈)을 전하는 자리에 배석한 인연도 있다. 용성스님이 성철스님을 많이 아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일화. 용성스님이 범어사에서 서울 대각사에 갈 때면 성철스님을 시자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서울 나들이’를 택하지 않고, 산사(山寺)인 범어사에 머물며 정진하기 위해 부산역까지 배웅한 뒤에는 몰래 도망쳐 절로 돌아왔다고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불자뿐 아니라 국민 누구나 다 아는 친근한 글이다. 이 가르침은 성철스님이 1981년 제6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될 당시 대중에게 전한 법어에 나온다. 취임법회에는 나서지 않은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종정 수락법어를 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67년 해인총림 해인사 초대 방장에 추대된 성철스님은 후학과 불자들을 위해 가르침을 전했다. 방장 취임 후 동안거를 맞아 대중에게 전한 설법으로 ‘백일법문(白日法門)’이라고 한다. 그보다 앞서 김룡사에서 ‘운달산 법회’를 통해 법문을 설하기도 했지만, 해인사에서의 백일법문은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총망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은 백일법문에 대해 “선(禪)과 교(敎)는 중도(中道)사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주제로 법문을 하셨다”면서 그 기조에 대해선 “중도로 선교 회통, 초기경전의 강조, 대승비불설 논판, 방편”이라고 했다.

○…해방을 몇 해 앞둔 1943년 스님의 나이 32세였다. 앞서 수덕사 정혜사와 간월암에서 만공스님에게 수행 지도를 받은 성철스님은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이때 도반 청담스님과 도우스님도 복천암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담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상주경찰서로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불가의 인연으로 만나 평생 도반의 정을 쌓은 지음(知音)이다. 훗날(1964년) 성철스님이 서울 도선사에 머문 것도 이같은 인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청담스님과 도선사 실달학원((悉達學院)을 열고 후학을 지도했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시자인 천제스님, 혜성스님과 함께 북한산과 회암사지 등을 순례하기도 했다. 

○…성철스님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 젊은 세대에게 법을 전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1966년에는 1월8일부터 2월20일까지 50일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대상으로 안거 정진을 지도했다. 이 때 성철스님은 “불교의 생명은 각(覺)에 있다”면서 불교 근본원리로서의 중도사상, 돈오점수설 비판, 현대과학과 불교의 합리성 등을 강설했다. 같은해 8월에도 대불련 학생들에게 참선정진과 함께 반야심경,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을 강의했다. 최초의 대중설법으로 ‘운달산 법회’라고도 한다. 이때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한 학생들이 성철스님 제자로 출가했다. 

■ 어록

화두를 참고하는 노년의 성철스님. 사진제공=백련불교문화재단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 성철스님의 출가시 한글 번역본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라고 하셨습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자신의 불공을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자는 이것뿐입니다. 
- 해인사 백련암 신도들에게 당부한 가르침

발원하옵니다. 철석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세세생생 무루선 닦아, 크고 큰 지혜와 덕, 커다란 용맹심으로 만겁 장애 만겁 미혹 모두 녹아지이다. … 저 허공은 비록 깨어진다 하여도 나의 원은 끝끝내 꿈쩍도 않으리, 시방삼세에 더 없이 더 높으신 분이시여, 오직 애민자비(愛民慈悲)를 내려 비밀히 가호하시어, 모든 장애 녹아 없어지고 어서 빨리 이 큰 원 이루어지게 하여지이다.” - 성철스님의 발원문에서 

청정한 계율을 견지하여 훼범(毁犯)하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최후 유촉은 불교의 생명입니다. … 이(불교) 정화가 성공한 근본 요인은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교단의 내외가 일제히 호응하였기 때문입니다. 
- 불교정화의 당위성을 강조한 가르침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님입니다. … 발 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불공을 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 
- 1983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 행장

젊은 시절의 성철스님

1912년 음력 2월19일(양력 4월6일) 경남 산청군에서 부친 이상언 선생과 모친 강상봉 여사의 4남4녀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했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1926년 3월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에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요양차 대원사를 드나들며 불교에 깊이 빠질 것을 우려한 집안에서 1931년 11월 혼례를 서둘렀다. 이때부터 1936년 초까지 대원사, 해인사 등에서 재가불자로 정진하다, 그해 3월3일 해인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해 사미계를 수지했다. 1937년 3월15일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원효암에서 용성스님을 시봉했다.

범어사 금어선원, 원효암, 내원암, 통도사 백련암, 금강산 마하연, 동화사 금당선원, 송광사 삼일암, 수덕사 정혜사, 서산 간월암, 법주사 복천암, 도리사 태조선원, 대승사 등 제방에서 화두를 참구하며 정진했다. 해방 후인 1947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원력을 세우고 청담, 자운, 우봉, 보문, 향곡, 월산, 종수, 도우, 보경, 법전, 성수, 혜암스님 등 20여명과 봉암사 결사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봉암사 결사가 무산된 이후 고성 문수암, 통영 천제굴, 파계사 성전암, 해인사 백련암, 도선사 등에서 정진했다. 1967년에는 해인총림 방장, 1981년과 1991년에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1993년 11월4일 오전7시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했다. 법납 58세, 세수 82세. 

[불교신문3241호/2016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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