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혼란을 극복하는 길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무소유와 

유사용의 정신으로 돌아가 

자기에게 부여된 권한을 

공익을 위해 공정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

지도층이 가진 만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결코 선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책무인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총체적 난국입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여당대표가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국정감사를 거부하고 단식농성을 하는 헌정사상 유래 없는 일로 정치가 실종됐는가 하면 대우조선을 비롯한 조선업계의 부실과 수출의 급감으로 국가경제는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또한 판검사와 같은 고위공직자가 거액의 부정한 돈을 수뢰했다는 의혹과 변호사가 수십억 원에서 백억 원에 이르는 부당한 수임료를 받았다는 의혹, 그리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에 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민심이 흉흉합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로 우리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경주에서는 지진까지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왜 현실이 이토록 답답하게 막혀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소위 지도층이란 자들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탐욕 때문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선량한 국민들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법정스님은 글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노자에 의하면 생명과 직결되는 식욕, 수면욕, 안전의 욕구 같은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소요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유지와는 관계없이 눈을 만족시키는 고가의 명품시계나 희귀한 보석, 혀를 만족시키는 송로버섯이나 샥스핀처럼 확장된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소요되는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으면 마음의 자유를 얻으며, 마음이 자유로우면 행복해지고, 행복하면 삶이 평화롭다고 했습니다. 무소유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유사용(有使用)’입니다. 유사용이란 삼라만상 중의 그 어떤 것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사용만 하는 것입니다. 즉, 권력과 재물과 자신의 육신까지도 내 것으로 하지 않고 내가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용도가 끝나면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추악한 권모술수와 모함과 비난과 투쟁이 난무하는 것은 무소유와 유사용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소유와 유사용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 용입니다. 용은 모든 일을 이루어주는 신통력을 가진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용은 그 귀중한 여의주를 뱃속으로 꿀꺽 삼켜 제 것으로 만들지 않고 입에 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용이 여의주를 제 것으로 하기 위해 뱃속으로 삼키는 순간 흉측한 이무기로 변하고 여의주는 신통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은 황제를 상징하고 여의주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줄 수 있는 황제의 힘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무소유와 유사용의 정신으로 돌아가 자기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데 사용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공정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부 몰지각한 지도층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그릇된 행태가 지속된다면 서민대중들의 분노가 유증(油烝)처럼 차올라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층이 가진 만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결코 선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책무인 것입니다.

[불교신문3241호/2016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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