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네이티브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주는 

창조의 힘을 

거부할 수 없다면 

스스로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자

그러면 나 자신이 변해 있고 

달라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고장 나서 이틀 동안 대여해 폰을 사용했다. 그 대여폰은 단순히 전화만 주고받는 역할 뿐이었다. 갑자기 연락할 일이 생겨 전화를 걸고 싶어도 내 머릿속에 저장된 연락처는 없다. 모두 휴대전화 속에 저장돼 있어 이틀 동안 참으로 난감했다. 이러다가 휴대전화가 정상으로 복구가 안 되면 그 안에 저장된 연락처는 영원히 잃게 되는가? 어디서 지인들의 전화번호들을 찾을까 하는 답답함이 나도 모르게 엄습해 왔다. 전화번호들을 수작업으로 기록해 놓았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기계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단 한사람의 전화번호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업무를 논하고 의견을 주고받고 결제를 해야 하는데 내가 전혀 읽지 않으니 상대들은 불안했고, 그 불안감으로 기다리다 못해 일반전화로 소통을 하고서야 안도감을 찾았다고 한다. 다양한 소통 채널에서 연락이 닿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이유는 멈추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요즈음 친구건 동료건 직장상사건 휴대전화로 그룹채팅을 통해 미팅하는 경우가 허다할 뿐 아니라 사적이든 업무적인이든 소통채널로 많이 이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는 아닌데 현실적으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멈추지 않는 세계,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죽기 전에 맞이하는 축복인지는 모르지만 늘 새로운 문화 앞에서는 익숙해지기까지의 두려움이 이는 세대이다.

가끔은 젊은이들은 승복을 입은 내게 말한다. “카톡 하시느냐”고. 그렇다고 하면 표정과 눈빛이 달라진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 세대에 합류를 해도 괜찮은 분, 안도의 마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때부터 소통이 시작된다.

함께 하는 소통 채널을 만들어 가자면 나이와 상관없이 어떤 문화이든 섭렵을 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닥치면 하나하나 배우고 습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즉 문화 노동을 즐길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울 때는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만 한다. 하면서도 이것 해서 뭘 할까, 못해도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는데 하고 뒤로 미루어 버릴 수가 없다. 왜냐면 습득하고 나면 몇 배로 활용의 값어치가 있고 시간 절약이 많이 되기 때문이다. 주변에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계시는 분 중에 더러는 자판 습득이 안 돼 오는 문자는 읽지만 보내는 문자가 안 돼 꼭 전화통화로 답신을 하는 분도 계신다. 또 카톡을 개설하지 않아 단체 문자의 공지사항을 전혀 인지하지 못 하고 있어 개별로 다시 전화를 거는 번거로움도 있다. 주체 측에서는 또 소통이 안 되는 분이라고 답답해한다. 디지털언어와 장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는 능력,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니면서 그 속에 살아가는 세대, 좀 더디고 어눌하면 어떻겠는가. 소통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싶다.

그러나 묵인할 수 없는 것은 기계가 주는 편리함, 그리고 기술적 도구들의 도움을 안 받는 것 같지만 늘 우리 현실 속 깊이 들어와 나를 지시하고 명령하고 세뇌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주는 창조의 힘을 거부할 수 없다면 스스로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 자신이 변해 있고 달라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신문3242호/2016년10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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