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인생…순간순간 최선 다해야 한다”

40년 야구인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이건열 감독이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 아래 사진은 선수를 지도하는 모습.

2012년 모교인 동국대 야구부 지휘봉을 잡은 이후 10여 차례나 전국대회 우승기를 거머쥔 이건열 감독. “야구는 인생과 같다”는 그는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선수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 10일 동국대에서 이건열 감독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대학야구팀의 전력은 비슷비슷합니다. 하지만 동국대 야구팀은 조직력과 팀플레이를 우선하며 경기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승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이건열 감독은 단체경기인 만큼 인화단결이 승리의 정도(正道)이며 지름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선수들의 정신력도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바로미터”라며 “경기가 잘 풀릴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집중하는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력이 다른 팀에 비해 뛰어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 게임 한 게임 최선을 다한 결과 우승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건열 감독은 우승과 인연이 깊은 야구인(野球人)이다. 1983년 동국대 2학년 재학시절 춘계대학리그에서 건국대를 꺾고 첫 번째 우승을 차지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승 깃발을 앞에 들고 선수들은 물론 응원 온 학생들과 함께 동대문야구장에서 학교까지 걸었던 그 시절이 마치 어제 같습니다.” 이 대회에서 이 감독은 결승전에서만 두 번의 홈런을 치는 등 맹타를 휘둘러 홈런왕을 차지했다. 그 후에도 4학년 졸업할 때까지 매년 전국대회 우승기를 모교에 선물했다. 

1986년 해태타이거즈(지금의 기아타이거즈)에 입단하며 프로야구에 입문한 그는 12년간 8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야구 선수 가운데 한 차례도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은 상황과 비교할 때 이 감독의 우승 인연은 남다르다. 

선수생활을 마감한 후에는 일본 주니치드래곤스에서 코치 연수를 거친 후 쌍방울 레이더즈, SK와이번스, LG트윈스, 기아타이거즈에서 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2012년 12월 모교 감독으로 부임해서는 특유의 지도력으로 동국대를 ‘야구명문학교’로 일신시켰다. 특히 2013년 전국대학야구춘계리그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전국체전 일반부 우승 등 3관왕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2014년에는 전국대학야구춘계리그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KBO 총재기 대회, 전국체전 일반부 등 4관왕의 기염을 토했다. 특히 2014년의 대학야구 4관왕은 1977년 최동원이 투수로 맹활약한 연세대 이후 37년만의 대기록으로 야구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이건열 감독은 동국대 사령탑을 맡은 이후 35명의 졸업생 가운데 27명을 프로야구에 진출시키며 ‘명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2015년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것도 그의 지도력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건열 감독이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광주 월산초등학교 5학년 때. 평소 달리기를 잘하는 그를 눈여겨 본 선생님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덩치가 작았던 ‘소년 이건열’은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일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밀어 붙이는 특유의 뚝심과 성실함을 무기로 ‘야구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월산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를 거쳐 군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경기를 치렀다. 고교 2학년 대전고와 맞붙은 청룡기 준준결승이었다. 4대4에서 연장전 10회말. 원아웃에 상대팀 주자는 3루에 있었다. 그의 포지션은 포수.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 경기는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 경기를 지면 4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3학년 선수들의 대학 진학이 어려웠다. 상대팀 타자가 친 땅볼을 3루수가 잡아 포수인 그에게 던졌다. 그런데 실수 아닌 실수로 상대팀 선수가 홈에서 세이프가 되고, 경기는 끝났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때 엄청 울었습니다. 같이 운동한 친구들에게 미안한 것은 당연했고요.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설사 그 볼을 잡았어도 주자가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지만 … 지금도 그 때 경기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그날의 경기는 ‘선수 이건열’의 야구 인생에 큰 교훈이 됐다. 이건열 감독은 “그 후로 어느 경기든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한 볼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잡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야구선수로 많은 경기를 치렀지만, 고교시절의 그 게임은 여전히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인연을 맺은 후 40여년이 넘게 야구인의 길을 걷고 있는 이건열 감독에게 야구는 무엇일까? 그는 “야구는 인생과 같다”고 전했다.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요. 야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새옹지마(塞翁之馬) 같은 인생과 비슷한 것이 야구입니다.” 그는 “운이 없어도 좋은 타구를 쳐서 경기가 잘 풀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순간의 실수로 경기의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면서 “그 어느 때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야구는 인생’이라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점수 1점을 내거나 주자를 진루시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번트를 대기도 합니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 그것이 바로 야구에 들어있는 정신입니다.” 

그는 주전뿐 아니라 후보까지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한마음이 되는 것이 야구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시합에 나가 직접 뛰는 선수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뒤에서 도와주는 조연도 경기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중요하지요. 이렇듯 야구는 우리 인생과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자주 한다. “어려울 때가 있으면 좋을 때가 있고, 잘될 때가 있으면 어려울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도 우쭐대거나 낙심하지 말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라.”

남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 가장 아픈 기억은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해 처음으로 1군에서 2군으로 내려갔을 때다. “그때 결혼한 지 얼마 안됐어요. 그런데 1군에서 뛸 자리가 없어,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집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1군 선수처럼 행동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다니며 자연스럽게 불교와 가까워진 이건열 감독은 지방 경기나 전지훈련 때는 인근의 사찰을 참배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는다. 캠퍼스커플인 부인 정순화씨는 자택 인근의 군법당에 다니며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남해 보리암 능원스님을 비롯해 스님과 불자들이 응원을 많이 해줍니다. 그리고 82학번 동기들이 짬을 내어 경기장을 찾아주어 너무 고맙습니다.”그는 프로야구 통산 896게임에 출전해 2할4푼의 타율을 기록했다. 투수와 유격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한 멀티플레이어로 1986, 1988, 1989, 1991,1993,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했다. 

이건열 감독은 “기회가 주어지면 프로야구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여건이 되면 정말 그동안 쌓은 실력과 장점을 보여주면서 멋있게 하고 싶습니다.” 40여년 넘게 선수와 지도자의 생활을 통해 충전한 기량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은 그의 희망이 실현되길 기대한다. 

평생 야구인의 길을 걷고 있는 이건열 감독은 후배이자 제자인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전했다. “야구를 잘하려면 기본기와 체력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비해 체격은 좋지만 체력과 근성은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야구선수가 되려면 기본기와 체력, 그리고 기술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은 인성(人性)과 정신력(精神力)입니다. 어려움에 닥쳐도 굴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힘, 그것은 인성과 정신력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1963년 4월25일 생. 광주 월산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동성중학교, 군산상고,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해 12년간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 일본 주니치드래곤스 코치 연수를 거쳐 SK, LG, KIA에서 코칭스태프로 활약했다.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도 지냈다. 2012년 12월 동국대 야구부 감독을 맡은 이후 10여 차례 전국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2015년 5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불교신문3252호/2016년11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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