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종평위 ‘종교 간 평화를 위한 역사 순례길’ 현장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지난 9일 경기 여주 주어사지를 찾았다. 주어사지는 한국 천주교학자들이 최초로 강학을 했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들에게 장소를 제공해줬다는 이유로 폐사를 당한 아픔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시선 닿는 곳마다 천주교 성지임을 알리는 푯말과 안내판이 가득했다. 200여 년 전 조선시대 박해받던 천주교인을 숨겨주다 폐사된 사찰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흔적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무 사이사이 간간히 달린 연등만이 이곳이 불교와 관련된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 9일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경기도 여주 산북면 주어사지(走魚寺址)를 찾았다. 주어사지는 한국 가톨릭, 즉 천주교 발상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지만 불교에서는 천주교인을 보호하다 아픈 대가를 치룬 곳이기도 하다. 18세기, 주어사에 주석하던 스님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천주학자들의 은신을 도왔고 천주학자들은 스님과 사찰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최초로 강학회를 열었다. 이 때의 강학회는 한국 천주교의 시발점이 됐지만 주어사는 이들의 은신을 도왔단 이유로 폐사됐다.

주어사지로 오르는 길. 천주교 산북성역화위원회에서 설치한 표지판.
앵자봉 중턱에 위치한 주어사지에는 천주학자들의 모습을 본 딴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이날 종평위 위원장 만당스님과 총무원 사회국장 지상스님을 비롯해 조계종 종무원 등 40여 명의 순례단은 종교 간 화합과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주어사지를 찾았다. 그러나 천주교 성지화 작업이 한창인 주어사지에는 사찰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주어사지로 오르는 길목 곳곳에는 ‘천주교 산북성역화위원회’가 설치한 흰색 나무 푯말이 눈에 띄었다. 여주시 시가 설치한 주어사지 안내판에는 “앵자봉에 있는 절터로 권철산 등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강학을 했던 천주교 전파의 요람지로서 한국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 가톨릭 교회 성역 순례길로 지정돼 많은 가톨릭 교인이 방문하고 있음”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순례단이 40여 분을 걸어 올랐을까. 주어사가 있던 폐사지에 도착한 신도 허만해 씨가 “어머어머 이게 웬일이야”하고 중얼거렸다. 허 씨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학자들의 모습을 딴 포토존이 버젓이 서 있었다. 허 씨는 “어려울 때 스님들이 먹여주고 숨겨주고 했던 은혜도 모르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주어사지를 둘러싼 갈등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2년 전에는 주어사지를 찾은 두 종교 신도들 간 직접적인 마찰도 있었다. 2014년 당시 주어사지가 천주교 발상지로만 알려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조계종 제2교구신도회는 주어사지로 오르는 길목에 연등을 달았고, 미사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산북공소 성당 신도들로부터 연등을 떼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2교구신도회가 “사찰이 있던 곳에 연등을 단 것이 무슨 문제냐”며 연등 떼기를 거절하면서 소란은 일시적으로 마무리 됐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 200여 년 전 두 종교 간 화합의 상징과도 같던 곳이 이제는 갈등의 장소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주어사지 안내판. 주어사 폐사 이유 등은 서술되지 않았다.

주어사지가 천주교 성지로만 알려지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 온 민학기 제2교구신도회장은 “천주교 신자들이 주어사지를 포함한 앵자봉 전체를 천주교 성지로 만들기 위해 매주 미사를 보고, 40만 평에 이르는 인근 땅을 조금씩 사들이고 있다"며 "불교에서는 주어사지가 스님들이 천주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을 치렀던 장소라는 것조차 알고 있지 못하는 신도들이 많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2012년 여주시 시 지정문화재 여주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된 주어사지 토지는 현재 산림청 소유로 돼 있다. 여주시가 2009년 주어사터에서 발굴한 부도탑은 여주군청에,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는 가톨릭 성지인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로 뿔뿔히 흩어진 상태다. 

천주교는 천주교 수원교구를 중심으로 산북성역화위원회를 구성해 천진암에 이어 주어사지를 성지화하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주변 토지 매입은 물론 정기적으로 주어사지를 순례하고 미사를 보며 나무 심기 등을 통해 성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불교에서는 제2교구신도회가 연등 달기 등을 통해 주어사지 문제를 알리고 있다.

종평위가 주어사지 순례길에 나선 것은 올해가 처음. 이날 순례단과 함께 주어사지를 둘러본 만당스님은 “그동안 종평위에서도 여주시에 공문을 보내 안내판에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도록 하는 등 시정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며 "무엇보다 스님과 신도들이 주어사지 문제에 대해 바로 알 수 있도록, 주어사지를 종교 간 화합과 상생의 장소로 가꿔 갈 수 있도록 고심 중에 있다”고 말했다.

한편 종평위는 오는 17일에도 주어사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조계종 포교사단 등이 참여하는 제2차 순례길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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