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일 1600일 25년, 그래도 희망 안고 거리로…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가족은

아직도 ‘4월16일’에 살고 있고

장애등급·부양의무제로 인해

2012년 이후 12명이 삶 등져

한 많은 생 살아 온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39명밖에 남지 않았다

2017년 새해에도 희망을 안고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세상과 싸우는 이들이 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광화문 4·16가족분향소.

새해는 희망이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1월1일, 새해에 뜨는 태양은 의미가 남다르다. 많은 이들이 가족, 친구, 연인들과 함께 해돋이를 보며 희망찬 새해를 기원할 때, 누군가는 길 위에서 세상과 싸우고 있다. 길 위에서 간절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도 새해는 희망을 품게 한다. 2017년 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거리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며 세상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기약 없는 싸움이지만 희망을 품고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장애등급제 폐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등을 위해 싸우고 있는 길 위의 사람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2014년 4월16일, 그 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였던 그들이 변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바다에 묻고 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들은 단식을 하고, 어머니들은 삭발을 했다. “진실을 인양하라”며 세월호 인양과 진상 규명을 소리 높여 외쳤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자벌레처럼 몸을 던졌다.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20일간 릴레이로 걸으며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했다. 하지만 1년, 2년,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시선은 무관심해졌다. 일부의 시선은 무관심을 넘어 차가워졌다. 이제 지겹다고, 그만하자는 푸념에도, “빨갱이다, 종북세력이다” 매도하는 비아냥거림에도, 몰상식한 이들의 조롱에도 포기를 몰랐다. 포기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관심에 먼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손을 내밀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노동, 인권 문제에 귀를 기울이며 연대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주축으로 ‘4·16 합창단’도 결성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세상을 떠난 고(故) 백남기 농민의 영결식을 비롯해 아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노래로 연대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세 번째 맞이하는 겨울이다. 1월1일로 992일째다.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은 거리에서 ‘세월호 선체 인양과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다.

지난 12월3일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제6차 촛불집회에서 미수습자 가족을 대표해 무대에 오른 이금희 씨는 “여전히 팽목항에서 2014년 4월16일을 살고 있다”며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미수습자 조은화 양의 어머니인 이 씨는 “세월호는 아직 바닷 속에 있다.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엄마로서 은화를 보내줄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힘을 실어 달라”며 “(세월호 인양은) 미수습자에게는 가족을 만나는 것, 유가족에게는 진상 규명의 증거, 생존자에게는 아픔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국민에게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광화문 근처가 직장인 권 모(33)씨는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하루 빨리 진실이 밝혀져 유가족들 아픔이 치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중행(37)씨도 “최근 촛불집회에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데 세월호 참사 직후 많은 이들의 관심이 있었다면 진상 규명이 가능했을 것 같다”며 “세월호 인양과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야말로 온전히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안산시 본오동에 거주하는 우정현(35)씨는 “세월호 문제가 하루 빨리 해결돼 안산공동체가 세월호 참사 이전처럼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며 “차디찬 바다 밑에 가라 앉은 세월호 인양이 결국 해를 넘겼다. 2017년에는 반드시 세월호가 인양돼 9명의 미수습자들이 모두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2012년 8월21일,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지하도에 농성장이 들어섰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과 가난한 이들이 모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1~2급의 장애가 아니면 장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거의 없고,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나 자식이 있으면 가난은 가족들이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 1월1일로 1595일째,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공동행동’의 농성은 계속되고 있다. 처음 농성을 시작했던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있던 해였다. 당시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남발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대폭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5년이 지났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대했던 공약은 헛된 약속이 되고 말았다. 공동행동의 농성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폐지될 때까지 무기한이다.

5호선 광화문 역사 내 마련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공동행동 농성장.

1500여 일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장애등급 3급 판정을 받은 송국현 씨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어 화마에 휩쓸려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체장애 1급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왔던 오지석 씨도 활동보조인이 퇴근하고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뇌사에 빠져 결국 세상을 등졌다. 광화문 역사 내 농성장 앞에는 송 씨와 오 씨 등 12명의 영정이 놓여 있다. 처음 농성을 시작할 때는 없었던 것들이다. 고단했던 삶에 비해 사진 속 얼굴은 밝기만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광화문역이지만 시민들은 무심히 영정을 스쳐 지나간다. 망자를 추모하는 국화도 색이 바랜지 오래다. 광화문 역사 내에서 만난 최영진(71) 할아버지는 “지하철을 타러 지나다가 영정이 보여 관심을 갖게 됐다. 그동안 이곳을 지나면서도 장애인 인권 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12명이나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영정과 함께 농성장 한 편에는 종이배로 가득한 상자가 놓여 있다. 빈곤과 절망의 바다에 희망의 배를 띄우자는 취지에서 진행되는 ‘분홍종이배의 꿈’ 캠페인이다. 역사 내를 지나던 시민들, 공동행동의 주장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하나 하나 곱게 접어 넣은 것이다. 공동행동은 “우리가 꾸는 꿈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없는 세상이다. 장애등급이 하락해서, 부양의무제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이 죽지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며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차별과 절망에 빠져 죽지 않을 수 있도록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 1992년 1월8일, 할머니들이 거리로 나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의 시작이었다.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대한민국 방문을 앞두고 시작된 수요시위는 이후 여성단체, 시민단체, 학생들, 종교계의 주관으로 정기적인 시위로 자리매김했다. 매주 수요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가 열린다. 2017년으로 수요집회가 시작된 지 25년, 하지만 ‘위안부’ 문제 해결은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은 줄곧 ‘위안부’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1965년 한일협정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실질적으로 끝났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2015년 한일 양국의 위안부 합의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할머니들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본의 전쟁범죄 인정과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공식사죄나 책임 규명없이 돈으로 해결하려 했고 한국 정부는 굴욕적인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일본대사관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모습.

지난 12월17일 나눔의집을 방문한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한일 합의에는 실제적인 국가 간 합의 과정이 없었다. 개정이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사안”이라며 “합의안을 만드는 과정에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아 법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조항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무효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윤영(26)씨는 “고등학교 때 봉사활동을 위해 시위에 참석한 뒤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됐다. 그동안 잊고 지내가다 최근 촛불집회를 계기로 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의 공식 사과가 이뤄져 할머니들의 한을 풀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할머니들이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238명이던 피해 할머니들도 이제 39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해 마지막 수요시위였던 제1263차 집회는 2016년 한 해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집회로 진행됐다. 하지만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할머니들을 위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가 있을 때까지 앞으로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 할머니들의 외침은 계속될 전망이다.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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