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혼란하던 시기 출생해

14세에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

민족대표 33인 구성 앞장서

독립운동 위해 평생을 헌신

윤봉길 의사 발굴, 상해로 보내…

찬불가‧역경사업 등 불교 현대화

 

“한국불교와 독립운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 용성스님입니다. 기미년 3‧1운동을 이끌고, 평생을 불교 현대화와 독립운동으로 일갈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용성스님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지난해 10월, 용성진종장학재단 총재 도문스님과 이사장 화정스님이 만난 자리에서 용성스님 선양사업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용성스님의 방대한 저서를 책으로 엮어내고, 매년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지만, 대중적으로 선양사업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스님들은 “중학생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펴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불교에 대해 잘 이해하면서 필력이 있는 소설가로 신지견 작가를 선정했다. 신지견 작가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때 범어사로 출가했으며, 잡지와 교계 언론에서 종사했다. 최근에는 서산스님의 이야기를 그린 <천년의 전쟁> 1, 2권을 펴내 경희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12월15일 신지견 작가와 함께 용성스님의 출생지와 출가사찰을 찾아 나섰다. 스님의 생가가 자리한 전남 장수 죽림정사에서 원로의원 도문스님을 만나 용성스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전해듣고, 최근 복원된 남원 교룡산 선국사를 찾았다. 승군 주둔지였던 선국사는 용성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소설 용성 연재에 앞서 도문스님과 신 작가의 대담을 정리해 소개한다.

 

“요즘 우리들은 넉넉하게 사는 습이 배어 있어요. 용성스님은 형무소에서, 또 사찰에 머물면서 항상 말씀하셨어요. 좁으면 좁은대로 만족하고, 배고프면 물 마시고. 있는대로 살아야 한다. 억지로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도문스님은 용성스님이 태어나서 자란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대한 설명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조선 정조 때 전라감사로 부임받은 이서구가 이곳을 지나갔다. 풍수지리학에 능했던 이서구는 죽림마을을 보고 “백년 이내에 한 도인이 출현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제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그 예언대로 1864년 용성스님이 탄생한 것.

“스님께서 14세에 사서오경 학습을 마치던 날, 꿈을 꿨다고 해요.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 ‘너는 불교와 국가를 위해 태어났는데, 지금까지 뭐하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더라는 거예요. 꿈에서 깨어난 스님이 그 길로 무작정 길을 떠났는데, 40리 걸어가 남원 교룡산 덕밀암(현 선국사)에 도착하니 노스님이 기다리다가 ‘백씨 동자 오셨는가’ 인사를 하더래요. 깜짝 놀라 사유를 물으니 전날 밤 스님의 꿈에 환성지안조사(1664~1729)가 나타나 예언을 했다고 해요.”

환성조사가 백씨 동자를 만나더니 ‘야 이놈아, 네가 내 후신이지’ 소리를 치자, 동자가 조사에서 ‘야, 이놈아. 네가 내 전신이지’ 맞받아치더라는 것이다. 노스님을 따라 용성스님이 대웅전에 도착하자, 꿈에서 봤던 부처님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길로 출가한 스님은 “범종이 울리는 듯하다”는 뜻의 진종을 법명으로, 용성을 법호로 받았다. “출가하자마자 법호까지 받은 스님은 용성스님이 유일할 것”이라는 도문스님의 설명이다.

“용성스님은 독립을 위해 무엇 하나 아끼지 않았어요. 기독교부흥회가 어렵다고 하면 그곳에도 보시금을 보내셨어요. 민족이 자각을 하려면 종교가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이셨지요. 윤봉길 의사를 발굴해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보내고, 일제가 뭐라하든 대놓고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용성스님이 독립운동을 위해 민족대표 33인을 구성,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자리에서의 일화다. 스님이 시자를 시켜 참석자들의 저고리와 신발을 감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도록 했다. 일제가 무서워 흩어질 경우, 독립운동이 힘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처사였단다.

“스님이 형무소에 있는데, 다른 종교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어요. 불교가 민족자각을 이끌려면 더 이상 한문에만 얽매여서는 안되겠구나 생각한 스님은 출소 후 풍금을 한 대 구입해 직접 찬불가를 짓고,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번역작업을 했습니다.”

약 5시간여 동안 도문스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도 시간은 짧았다. 신지견 작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설이라는 것이 일정정도 픽션이 들어갑니다. 용성스님처럼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분의 이야기를 쓸 때 조심스러운 점도 그것입니다. 일종의 허구를 통해 재미있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혹시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이 야단칠까 걱정도 됩니다.”(신지견)

“스님의 일대기야 여러 권 책으로 정리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어느 정도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할 겁니다. 필력도 있고, 절집도 잠시 겪으셨다니 잘 부탁합니다.”(도문스님)

“제일 걱정이 참 이야깃거리가 많은 스님인데, 한권 책 분량으로 맞추려니 그것도 고민입니다.”(신지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몇 가지만 선별해서 잘 엮어주십시오. 여러 사람 말을 들어보니 소설이 너무 길어도 안 읽힌다고 해요.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부탁합니다.”(도문스님)

오랜 대화를 마치고 신 작가는 다시 남원 교룡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성곽 일부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교룡산 입구는 승군과 관군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던 곳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성곽 가운데 선국사를 중심으로 군기터, 체련장 등 군사 시설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선국사로 오르는 가파른 길 중간에는 폐가가 된,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사람들이 거주했던 가옥의 흔적도 남아 있다.

“안 기자. 빨리 와 보소.” 신 작가의 재촉에 사찰에 오르니 탁 트인 지리산의 절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으로는 남원 시내가 펼쳐져 있다. 교룡산이 작은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알 것 같았다.

“용성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셨네요. 그러니 도인이 될 수 밖에 없지. 정말 좋지 않아요?” 신지견 작가가 한참동안 절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스님, 이사장 화정스님)의 지원으로 진행되는 용성스님의 이야기는 격변하던 대한제국의 역사와 맞물려 올해 1년간 연재될 예정이다. 그림은 배종훈 화백의 유화작품으로 연재한다.

용성진종대종사

스님은 고종 원년, 1864년 음력5월8일 전남 남원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서 수원 백씨 남현 공의 후예로 출생했다. 14세에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 혜월스님이 동학교주 최제우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해 16세에 해인사 극락암서 화월스님을 은사로 득도. 양주 고령산 보광사 도솔암에서 수행 중 깨달음을 얻었다.

21세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율사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하고, 지리산 칠불암에서 머물다가 51세에 백암산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 56세 때인 1919년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며, 중국 연길에 농토를 구입해 독립운동과 동포들의 생활을 지원했다. 또 함양에 대규모 전답을 구입해 선농불교를 일으키며, 과수원 수익금을 독립자금으로 전달.

서울 종로 대각사에 일요학교를 설립해 어린이 포교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찬불가를 만들어 널리 불교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67세에 서울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를 지도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지성화를 주창하신 스님은 1940년 2월24일 종로 대각사에서 세수 77세, 법랍 61세로 입적했다.

 

 

신지견 작가

본명은 신평우. 1944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했다. 지견은 출가 때 은사 광덕스님에게 받은 법명이다. 경희대에서 황순원 선생에게 소설을 지도받았으며, 출가 후 환속해 동국제강 계열 회사인 월간 <대원> 편집장을 지냈다. 장편소설 <그림자 연구>(전 5권) <탑 그늘로 지다> <다비장 가는 길> <벗어버린 사슬> <서산>(전 10권) <천년의 전쟁> 등이 있다.

 

배종훈 화백

1975년생. 2003년 월간 <불광> 연재를 시작으로 <불교신문> 등에 선(禪)과 명상 등을 주제로 카툰을 연재하고 있다. <내 마음의 죽비소리> <자네 밥은 먹었는가?> 등의 작품집이 있으며, 2010년 불일미술관에서 ‘맑은 생각, 카툰 선을 만나다’를 비롯해 수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단원미술대전 입상, 구상 공모전 입상 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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