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먹여 살리는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베푸는 마음가짐 지닌 사람이

세상살이에서 질서 잘 지키고

속 좁은 사람일수록 계율무시

도덕적일수록 참을성 강하고

매사 성실해 남도 이롭게 해”

화엄경 대승기신론 심층 탐구

신심ㆍ진심으로 공부하는 스님

“살아있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 신심 

‘자성청정심’에 대한 믿음이

진짜 신심입니다…”

용학(龍學)스님은 30년 동안 경(經)을 봤다. 대강백 무비스님으로부터 강맥(講脈)을 이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읽고 쓴다. “모든 경전을 해독할 수 있는 지렛대와 같은” <대승기신론>을 주해하는 일에 몰입하고 있다. 방안에는 큼지막한 <화엄경> 약찬게(略簒偈) 요해(要解)가 깔렸다. 화엄경의 거대한 체계를 도표 형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1만 부를 찍어 전국의 출재가 강원(講院)에 배포할 참이다. 그야말로 용학, ‘용의 학문’이랄까. 앎의 깊이가 까마득했다. 생전 처음 듣는 심화개념을 줄줄이 외웠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설법능력. 교리의 요체에 관한 설명은 웅장했고 조밀했으며 무엇보다 참으로 구수했다.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자가 가장 잘 아는 자 아닐까. 스님은 용처럼 말했다.

스님은 우리말의 오묘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짧은 말일수록 본질에 가깝다는 것이 한국어의 특징이다. 한 글자로 된 단어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이다. “눈 코 입 귀 피 살 꽃 꿈 돈 똥 숨 돌 해 달 물 불 별 땅 손 발….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만 있으면 충분히 삽니다.” 말이란 게 원래 길어질수록 지저분하다. “입으로 이것저것 맛보면 그만인데, 단맛만 취하려다 스스로 입을 ‘주둥이’로 깎아내리고, 남의 입을 주둥아리라 멸시하며 세상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게 중생의 업입니다. 손을 손모가지라 부르는 마음은 또 얼마나 거칠고 탁합니까?” ‘삶’이란 낱말부터 외자다. 스님은 “어떤 삶이든 그저 삶으로 달갑게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불자(佛子)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대승기신론>은 참다운 믿음에 관한 논서다. 신라 원효스님이 이에 대한 소(疏)를 붙여 우리 역사가 배출한 최고의 대사상가로 등극했다. 불교의 근본은 믿음이다. 그저 부처님을 믿는 것이라면 이른바 ‘하나님’을 믿는 행위와 도긴개긴일 것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대한 믿음이 진짜 신심”이다. ‘지금 내가 있는 그대로 한없이 깨끗하고 고귀한 부처’라는 확신이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린다. 요즈음 유행하는 개념으로 따지면 자존감이 곧 신심이다. “아무리 값비싼 휴대폰을 소유했다고 한들, 그걸 봐주는 눈이 없고 그걸 다루는 손이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할 줄 안다면 누구나 부처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몸뚱이 하나만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신심입니다.” 그냥 행복하고 마냥 행복한 사람은 남을 해쳐서 살찌우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살아있음’만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더욱 값지게 하기 위해, 우리는 수행을 한다. 수행은 단순한 삶을 위한 연습이다. “눈을 눈답게 쓰고 귀를 귀답게 쓰는 것이 수행입니다. 눈이 잘 보인다고 남의 재물에 눈독을 들이고 손놀림이 빠르다고 도둑질을 하고 머리가 좋다고 사기를 치지 않는 게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출가수행자라면 입이 있는 한 법문을 하고 눈이 있는 한 대장경을 탐독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생각도 청정해진다. “아침에 일어나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모든 계급장 다 떼고, 족보에 연연하지 말고, 통장계좌에 얼마나 남았나 전전긍긍하지 말고…, 이렇게 환하게 볼 수 있고 역력하게 들을 수 있고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 진실로 내가 부처 아닌가? 유명한 ‘이뭣고’ 화두가 의심 이전에 벅찬 감동으로 다가올 겁니다.” 

나를 믿으면 나의 삶에 만족하게 되고, 나를 진심으로 믿으면 맑아지게 마련이다. 중생이 오판하고 실수하는 까닭은 끊임없이 본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마음이 넓은 사람은 항시 지혜롭다.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덕분이다. 처지가 어찌 됐든 인내할 수 있기에 지혜롭고 언제나 정직하기에 지혜롭다. 그러므로 단순한 삶이 가장 위대한 삶이다. 

용학스님은 “최고의 보시는 재보시”라고 단언했다.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보시가 으뜸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도 일단 배가 불러야 귀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육바라밀은 대승불교가 독려하는 실천행이다. 6가지 덕목은 마구잡이로 배치한 것이 아니다. 보시가 선행돼야 지계가 가능하고 지계가 이뤄져야 인욕이 달성된다. 궁극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지혜는 꼼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보시에서 비롯된다. 

“보시는 인간성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베푸는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이 세상의 질서를 잘 지킵니다. 속 좁은 사람일수록 계율 무시하고 삽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참을성이 강합니다. 잘 참는 사람이 게으르겠습니까? 부지런합니다. 이게 정진바라밀입니다. 매사를 성실하게 임하며 스스로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합니다. 게으른 사람이 참을성 있는 것 봤습니까? 욕심만 부지런합니다. 정진이 무르익으면 완전히 도정(精)된 쌀알처럼 성품이 단단하고 매끄럽습니다. 이익이 된다고 흔들리지 않고 손해가 된다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비방을 당해도 견디고 칭찬을 받는다고 흐뭇해하지 않습니다. 생활이 고요해지니 선정이요 결국 살아가는 자체가 지혜입니다.” 걸어 다니기만 해도 전법(傳法), 웃기만 해도 법열(法悅)인 경지다. 

용학스님은 은해사 승가대학원 1기생 출신이다. 1994년 종단개혁 이후 경학(經學)에 능통한 선지식을 배출하기 위한 종단 차원의 교육불사였다. 원장이었던 무비스님의 지도 아래서 휴일도 없이 정진했다. 용학스님은 “학인 1명당 1억원씩 들였다”고 했다. 박식한 학승이면서 무애한 선승 같기도 한 용학스님의 장광설을 들으며 ‘종단이 물건 하나는 제대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대승기신론>을 직접 풀이한 책에 어느 날 새벽 환희심에 불타 적은 메모. “起信論(기신론)이 元曉(원효)의 日誌(일지)였다. 나는 元曉스님의 日誌를 대출하여 마음의 빚을 청산하고자 한다. 修行(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묻지를 마라. 人間(인간) 자체만으로 황홀한 인생. 마음이 바다, 마음이 산.” 습관이나 직업의식이 아니라 신심과 환희심으로 공부하는 스님이다. 즐기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스님과 함께 경내를 걸었다. 처소에는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가 심겼다. 강직하면서도 풍류를 아는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취미다. 스님은 완전히 시든 국화꽃 망울을 가리키더니 손으로 비벼보라 했다. 금세 얼큰한 향기가 손에 가득 배었다. 모두가 무관심했거나 무시했을 뿐, 꽃은 죽음 속에서도 샛노랗게 살아있었던 것이다. “참나무를 왜 참나무라 하는지 압니까?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으니까 참나무예요. 한겨울에도 도토리를 풍성히 낳아 산짐승들을 먹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요. 참사람? 남들 먹여 살리는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인간 자체만으로 황홀한 인생.’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면, 그것이 자비요 기적이구나. 

[불교신문3267호/2017년1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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