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건배사로 다양한 구호들이 날아다닌다. 나도 질세라 한 마디를 보탰다. “병신 닭을 솎아내고 정품 닭을 들여보세˜” 제법 인기가 있었다. 병신년의 온갖 불행을 묻어버리고 제대로 된 정유년을 맞이하자는 뜻이었다. 좌중의 웃음이 술잔을 빠르게 들어올렸다. 병신 닭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탓이리라. 하지만 내 의도는 조금 달랐다.

AI 바이러스의 창궐에 농가의 시름이 깊다. 솎아낼 수 없어서다. 정부정책은 청정국가를 지향한다. 하여, 감염 우려만으로 산목숨을 모조리 묻어버린다. 구덩이에 던져 넣은 마대자루가 꿈틀댄다. 농부의 두려움이 아카시아뿌리처럼 흙을 뚫고 올라온다. 뉴스화면에 나온 농부는 애써 고개를 외로 꼰다. 양심까지 묻을 순 없으므로. 경제적 손실과 더불어 이중의 고통이다. 그렇게 죽인 숫자가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한 짐승이다. 오염 안 된 남의 자식을 훔쳐 먹으려고 의심되는 어미를 쓸어 모아 산 채로 죽인다. 이른바 살처분. 인간의 이기심과 정비례하여 계란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나 역시 먹지 않을 수 없으나 정말 이 방법뿐일까 곱씹어본다. 우리에게 기다림은 불가능한 것인가. 자연의 순리에 맡기면 안 되겠는가. 목숨들은 어차피 그렇게 진화해왔으므로. 생명체가 스스로 균을 이겨내는 저항력을 갖도록 기다려줄 여유는 인간에게 없는 것인가. 그렇게 하는 나라들도 있다는데…. 생산성과 효율을 앞세운 경제논리 앞에 소설가의 한탄은 무력하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살생은 숙명이다. 채식주의자라며 곡식과 나물만 먹는다고 외쳐봐야 소용없다. 곡식이나 열매도 식물의 종자이므로 남의 자식을 빼앗긴 마찬가지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음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을 가지려 하지 않음이다. 살생에도 정도(正道)가 있다. 사냥도 스포츠라는 말에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내가 낚시를 즐길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비만을 부를 정도로 먹어대는 것도 무소유 정신과 거리가 멀다. 모든 불행은 불필요한 것을 욕망하여 시작된다. 수천만의 산목숨을 죽여 지키려는 가치가 무엇인가. 그 또한 과욕이 아닐까. 지옥은 이승에도 있다. 천당도 그렇고. 고기 맛도 아는 자에게 의미가 있다. 죽은 뒤에 천당을 보여준들 이승에서 맛보지 못한 자가 그곳이 천당인줄 알기나 할 것인가. 천당은 이승에서 미리 욕심을 털어낸 자의 몫일 터. 오늘도 소설가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불교신문3268호/2017년1월25일자] 

권행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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