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는 불교 근간 마련     

松雲於師              사명 송운의 스승으로

留侯黃石              장량과 황석공의 관계이다.

顯績陰敎              드러난 업적과 숨은 가르침은

一體千億想像         일체의 모든 기억을 생각하게 한다.

一燈長明之下        한 등불의 밝음 아래 

講授徒弟              강의를 받은 제자가 

無乃是君臣大義     군신의 대의만 못하겠는가?

不然                    그렇지 않은가?

宗國危亂之秋         나라의 위기가 가을 낙엽 같을 때

紛釋難                 어지러운 것을 풀고 어려운 것을 이해하게 함이

何能使成就如彼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통도사에 모셔진 청허휴정(淸虛休精, 1520〜1604)스님 진영에 적혀 있는 조명겸(趙明謙, 1687~?)의 영찬이다. 영조 때 문신으로 활동한 조명겸은 늦은 나이에 조정에 출사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교리(校理)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병조참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역임했으며 외직으로 경주부윤, 강원도관찰사로 지냈다.

조명겸이 청허스님을 위해 찬문을 지은 시기는 그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지냈던 1739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경주와 인접한 밀양 표충사에서는 사명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 불사가 한창이었으며 이 중 가장 비중 있는 활동이 바로 당대 명사들로부터 사명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시문을 받는 일이었다. 경주부윤 조명겸 역시 기미년인 1739년 정월에 시를 지어 표충사의 남붕태허(太虛南鵬, ?~1777)스님에게 보냈고 이 글은 현재 <표충사제영록(表忠寺題詠錄)>에 수록되어 전한다. 

18세기 전반 영남에 무르익던 사명스님의 추모사업은 사명스님의 스승인 서산스님을 함께 기리고 칭송하는 일로 확산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된 듯 조명겸이 지은 서산스님 영찬에는 사명스님의 스승인 서산스님을 강조하면서 혼란의 시기에 나라를 구했던 사명스님의 활동이 모두 서산스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전란 당시 구국활동을 펼친 서산, 사명, 기허스님을 기리는 사액사원인 대흥사, 표충사, 수충사 등이 전국에 세워졌고 특히 영남에서는 사명문중이 세거한 통도사, 은해사, 보경사, 용문사, 광흥사에서 서산스님과 사명스님의 진영을 나란히 모셔 선사(先師)의 예를 표하고 사회로부터 불교가 존중받을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스님들께 감사를 표하였다.

[불교신문3268호/2017년1월25일자] 

해제=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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