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김준혁 지음, 더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깊은 마음이 담겨 있다. 정조의 마음을 읽고 화성을 설계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정조와 다산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정책을 만들었던 임금이 있다. 조선 정조다. 정조가 백성들이 누구나 부유해지고, 화목하고 즐겁기를(戶戶富實 人人和樂) 꿈꿨던 마음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신대 교수이면서 ‘정조’를 학문의 영역으로 올려놓은 김준혁 교수가 수원 화성을 소재로 “정조와 다산으로부터 배우는 위민(爲民) 사상”을 소개했다. 김준혁 교수는 정조의 애민정신을 성곽 축조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전하고 용주사를 중창한 정조는 이어 화성을 축조하면서 백성들의 노고를 가장 걱정했다. 수고를 덜기위해 “성벽을 쌓아 나갈 때 일의 양에 따라 노임을 지급하고, 짐을 나를 때 수레를 사용하며, 거중기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완성된 화성의 전체 길이는 4600보였다. 다산이 계획했던 3600보보다 1000보가 더 커진 크기였다. 축성 공사를 시작하기 직전인 1794년 정월에 정조가 현륭원을 방문하고 나서 공사현장을 들렀다. 이때 성벽을 쌓을 위치에 깃발을 꽂아서 한눈에 성벽 위치를 알아보도록 준비가 됐다. 정조는 팔달산 정상에 올라 깃발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장안문을 더 바깥으로 이동하도록 명했다. 장안문 인근에 많은 민가가 철거될 것을 염려한 결과였다.”
화성에는 아름다운 연못인 방화수류정이 있다. 성안에 연못을 마련한 이유는 그곳의 흙을 퍼서 공사에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노고를 조금이나마 줄이려는 마음에서 기원됐다고 한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보면, 백성을 아끼던 정조의 마음이 더욱 깊숙이 다가온다.
“대학원 과정 때, 규장각에서 <범우고>란 생소한 이름의 책이 눈에 띄었다. 1799년에 간행된 조선시대 불교 사찰 현황에 대한 책이었다. 숭유억불이란 말이 뇌리에 박힌 나는 조선은 무조건 불교를 억압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조는 ‘조선의 승려들도 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정조 때의 사찰 수가 조선 초기 사찰보다 많았고, 정조 때 중창한 사찰도 상당수였다. 점점 이런 정책을 만든 정조에게 빠져들었다.”
저자는 화성을 통해 정조의 마음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18세기 건축된 축조물을 뛰어넘어, 그 안에 깃든 마음이 바로 화성의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화성 전문가를 자청하는 김준혁 교수는 중앙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중앙대서 <조선후기 정조시대 불교정책>으로 석사학위를,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계종 문화재환수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불교신문 3271호/2017년2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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