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왜색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정체성 수호를 위해 진력한 석전정호(石顚鼎鎬) 스님. 속명인 박한영(朴漢永)으로 유명한 스님은 두 차례나 조선불교 교정(敎正)을 지내고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역임했다. 1948년 4월8일 정읍 내장사에서 열반에 들었을 당시 서울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도 호상소(護喪所)가 설치돼 조문객의 발길이 이졌다.

그런데 석전스님이 사회법으로 ‘사망 신고’가 이뤄진 것은 입적한지 65년의 세월이 흐른 2012년 7월이었다. 세수로 140세가 넘어서까지 법적으로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1948년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입적 사실이 보도 되었지만, 정작 행정 당국은 사망신고를 처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해방 이후 혼란한 시대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수립 이전의 미군정하에서 행정체계가 지금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불교의 수행가풍도 영향을 끼쳤다. 부모형제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오고가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수행자 입장에서 세속 관청의 신고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계 안팎의 존경을 받은 스님의 법적 사망신고가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잘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석전스님의 사망신고 미이행 사실은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이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확인했다. 입적 당시 신문기사와 구암사 주지 지공스님을 보증인으로 한 후에야 순창군 복흥면 주민센터가 신고서를 접수했다. 종걸스님은 “현행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직계 가족이 아니면, 누구도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면서 “여러 방법으로 자문을 구한 결과 스님의 (마지막) 주소지인 순창 구암사에서 신고서를 제출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은 근현대 스님들의 행장을 면밀히 살피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생사에 자유로운 스님들이지만, 열반에 드신 후 법적으로 마침표를 찍어드리는 것은 후손의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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