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화두는 오직 늙고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이었다. 쾌락과 선정, 그리고 고행을 통해서는 결코 늙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체득한 붓다는 나무 밑에 앉아 늙고 죽음의 원인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아야 처방이 나오기 때문이다.

“늙고 죽음 왜 생겼나? 태어남이 있기 때문. 태어남은 왜 생겼나? 존재 열망이 있기 때문. 존재열망 왜 생겼나? 내 것으로 취함 때문. 내 것 취함 왜 생겼나? 상대 애착 하기 때문. 애착함은 왜 생겼나? 좋고 나쁜 느낌 때문. 상대 느낌 왜 생겼나? 서로 접촉 하기 때문. 접촉함은 왜 생겼나? 여섯 기관 있기 때문. 여섯 기관 왜 생겼나? 몸과 마음 있기 때문. 몸과 마음 왜 생겼나? 나름 생각하기 때문. 나름 생각 왜 생겼나? 의도적인 행위 때문. 의도행위 왜 생겼나? 밝지 못함(無明) 때문이네.”

결국 늙고 죽음의 근본원인은 무아법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의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늙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사라져야 한다. 원인을 정확히 알았으니 이제는 처방이 나올 순서이다. 그 처방은 바로 대면관찰이라는 네 알의 약이다.

“무아법에 밝으려면 네 가지로 관찰하세. 몸에 대해 몸을 보고, 느낌 대해 느낌 보고, 마음 대해 마음 보고, 법에 대해 법을 보세.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하세.”

네 알의 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효능은 번뇌의 소멸과 관찰자 체험이다. 몸과 마음을 대면 관찰하니 고통이 사라지거나 누그러진다. 그리고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야말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 성품인 것이다.

“몸과 마음 변화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나, 관찰자는 여여부동 늙고 죽음 초월하네. 본래 해탈인 것이다. 우하하하하하!”

자신의 성품이 본래 크고 밝고 충만함을 알게 되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큰마음으로 웃으며 살면 될 뿐이다. 또한 스스로 결핍을 느끼지 않으니 더 이상 밖으로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그저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면 그만이다. 감지덕지인 것이다.

[불교신문3294호/2017년4월29일자] 

월호스님 논설위원·행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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