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2600년 전 금융업을 장려했다

 

중아함경 장려…근본유부율엔 

삼보 위해서라면 ‘무진물’ 회전 

‘이익 추구해도 좋다’고 했지만 

부채 있으면 출가 허락하지 않아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중동의 오일머니를 국내에 들여오기 위해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려다 개신교의 반대에 직면해 포기한다. 중동의 오일머니는 중동이 석유 수출로 형성한 금융기관의 보유 자금을 말하는데 왜 다른 나라의 자금을 들여올 때와는 달리 새로운 법제정이 필요했을까? 여기에는 이자를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특징이 개입돼 있다. 이슬람교는 이자를 금지하므로 이자에 해당하는 돈을 주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즉 투자의 형태로 돈을 빌려 이자를 투자의 과실로 되돌려준다. 원래 투자란 손해를 보면 아무 것도 되돌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이자란 빌려간 측이 아무리 손해를 보아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투자의 과실과 이자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투자의 형식으로 이자를 지불하게 하려면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

이슬람뿐만이 아니다. 기독교도 이자를 금지했기에 이자를 받았던 유태인들이 유럽에서 특히 미움을 받았다. 기독교가 이자를 허용하게 된 것은 캘빈이 종교개혁을 하고 난 뒤의 일인데 실제로 기독교 은행이 설립될 때까지는 또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며 그것을 봐도 이자의 허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알 수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최고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자를 악한 것으로 보았지만 캘빈은 이자를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도들이 이자를 허용하지 않았던 시절에 유태인들은 유럽에서 홀로 금융업에 뛰어들어서 로스차일드 같은 세계적 금융기관이 탄생한다.

불교는 2600년 전에 이자를 허용했다. 허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려까지 했다. 우리는 이자를 허용하는 불교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비교해보면 매우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중아함경>은 “처음에는 먼저 기술을 배워라. 그 다음으로는 재물을 구하고, 그리고 재물을 구한 뒤에는, 그것을 나누어 4분(四分)으로 만들라…농사꾼이나 장사꾼에게 주어, 나머지 1분에는 이자(利子)를 나게 하고…”라고 설한다. 돈을 절약해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라는 주장은 알고 보면 금융업을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초기불교 시절 사찰은 부동산의 대부, 대출 등의 금융활동을 해왔다. 한국불교에서도 계(契)의 전신에 해당하는 보(寶)는 처음에는 불교의 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사원의 기본 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자사업의 기능을 했다. 중국에서도 무진장, 장생고 같은 금융기관이 사찰에 설치돼 경제에 중요한 활동을 했다. 

비록 이자가 경제활동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불교는 돈 빌리는 사람은 부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이자를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다.

중아함경은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빈궁한 것은 큰 고통이요,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남의 재물을 빌리는 것은 큰 고통이며,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남의 재물을 빌려 이자가 길어 가는 것은 큰 고통이요,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빚 주인의 독촉을 받는 것은 큰 고통이며,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의 빚 주인이 자주 그 집에 가서 독촉하는 것은 큰 고통이요,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빚 주인에게 묶이는 것은 큰 고통이라 하느니라”라고 설한다.

부채가 얼마나 큰 고통이며 이자가 늘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빚진 사람이 출가해 빚쟁이가 끌어가게 했느냐고 부처님이 꾸짖고 있기에 빚을 지면 사람을 끌어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전은 “구족계를 주려면 남의 빚을 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주어야 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빚진 사람은 비구로 받지 않았다. 부채가 있는 자 이외에도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자, 주인의 허락이 없는 노비, 현역중인 관리나 군인, 완전한 남자가 아닌 자, 나병 등 6가지의 병이 있는 자는 비구가 될 수 없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금융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불교는 일찍부터 금융이 매우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허용했다. 금융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허용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사찰이 직접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유부율>에서는 삼보(三寶)를 위해서라면 무진물(無盡物)을 회전하여 이익을 추구해도 좋다고 설한다. 중생구제를 지향하는 대승불교는 불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으며 자비의 관점에서도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불교신문3294호/2017년4월29일자] 

윤성식 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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