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얽매임서 해탈해야 영혼이 깨어난다

 

여래 가르침 깨달아 해탈하고

다른 사람까지 해탈하게 하는 

보살의 삶이 가장 뛰어난 삶 

“수보리여, 갠지스강에 있는 모래알 수와 같이, 이 모래알 수와 같은 갠지스강이 있다면,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이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이 어찌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의) 모든 갠지스강이라 해도 오히려 많아서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모든 강의) 그 모래알이겠습니까.” “수보리여,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써 그대에게 이르노니, 만일 자질이 뛰어난 남자(善男子)나 여인(善女人)이 저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베푼다면 얻는 복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자질이 뛰어난 남자나 여인이 이 경(經) 가운데에서 사구게송 등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칠보로 보시했던)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니라.”

제11분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보살의 삶이 가장 뛰어난 것임을 밝힌 말씀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복된 삶을 꿈꾼다. 사람들이 무언가 끝없이 도전하는 것은 결국 행복한 삶을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자리 또는 명예를 얻으려 하는 것도 아직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면 세계 최고의 부자나 막강한 나라의 대통령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먼저 상상을 초월하는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우주를 채울 정도의 보석을 소유한 부자가 자신의 모든 보석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베푼다면 그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물으셨다. 다시 말해 그가 얼마나 행복해 하겠느냐고 질문하신 것이다.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남긴 재산기부자들이 있다. 그들의 선행은 누가 강요해서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예를 드신 베풂을 한 이의 복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수보리존자도 그 복이 매우 많다고 답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상상을 불허하는 비유를 드신 것은 뒤의 짧은 구절을 위한 장치이다. 즉 ‘여래의 가르침(진리)을 깨달아 자신도 해탈하고, 그 가르침을 잘 설파하여 다른 사람을 해탈시키는 사람의 복덕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핵심인 것이다. 여기 좋은 예가 있다. 

인도의 성왕(聖王)으로 추앙받는 아소카대왕(Asoka, BC 3세기)은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든 인물로 그의 정치·경제·문화·복지정책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도를 통일하기 위해 벌인 전쟁으로 수십만명이 희생되는 참사를 직접 전장에서 목격한 그는 무력에 의한 정복정책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나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그의 모든 정책은 완전히 바뀌었다. 십년에 걸쳐 불경(佛經)을 모으고 성지를 순례하며 불탑과 석주(石柱)를 세워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백성들에게 알렸으며, 자신의 자녀를 출가시켜 스리랑카에 전법(傳法)을 하라고 보냈다.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에 고승을 파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렸다. 모든 백성들이 혜택을 받는 복지정책을 펼치면서 아울러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그 마음까지 해탈시키려고 노력한 아소카대왕이야말로, 참된 구도자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보살이었다.

싯다르타 이전이나 동시대에도 수많은 수행자들이 있었다. 싯다르타보다 더 철저한 윤리주의자도 있었고, 더 청빈하게 산 수행자도 많았으며, 국왕의 스승노릇을 한 수행자도 많았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이 깨어있도록 하지 못했다. 모든 얽매임(苦)으로부터 해탈할 때만 영혼은 항상 깨어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고(苦)라고 말하는 이는 아직 영혼이 깨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정말 행복하고 자유롭길 바란다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을 모르는 사람이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선 안 된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불교신문3294호/2017년4월29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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