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불상과 함께 묻혀있던 통일신라 범종

1970년 담장 공사하다 발견

일부 부식됐지만 비교적 양호

가치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

일본 코묘지종과 동일 시기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주 운천동 출토 종. 보물 1167호이다. 높이는 78cm이며, 통일 신라 시대인 9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종은 1970년도 청주시 운천동(雲泉洞)에서 신축 가옥의 담장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독특하게도 종 내부의 공간에 고려시대의 쇠북(金鼓)과 향로, 청동발(靑銅鉢), 금동보살입상이 들어 있는 상태로 출토되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함께 매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종 자체에는 아무런 명문이 없지만 동반 출토된 쇠북의 후면 구연에는 ‘己巳六月 日句陽寺飯子一重十三斤八兩棟梁道人直長改造大匠仍及三’의 명문이 남아있어 ‘기축년 유월에 구양사 용으로 13근의 중량을 들여 만든 반자이며 대장 잉급삼이 만들었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구양사란 절과 관련된 기록은 아쉽게 확인할 수 없다. 쇠북의 제작 시기인 기축년은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12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함께 발견된 보살입상도 고려시대의 양식을 구비하고 있어 범종 역시 고려시대의 제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범종은 전체적인 외형과 문양을 통해 고려시대가 아닌 통일신라 종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뒤늦게나마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필자가 다음 호에 소개할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코묘우지(光明寺) 소장 통일신라 종을 조사하여 소개하는 과정 중에 종신 몸체에 부조된 주악비천상의 형태와 당좌의 문양이 거의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운천동 종 역시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9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것임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운천동 출토 종의 ‘주악천인(비파)’.

오랜 기간 땅속에 묻혀있던 관계로 발견 당시 군데군데 부식이 일부 진행되었으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처리를 거친 후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종의 전체 크기는 78cm 정도로서 통일신라 범종 가운데 비교적 적은 편에 속하지만 외형은 항아리 모양의 둥근 곡선으로 부드럽게 처리되었다.

세부의 특징을 살펴보면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은 외연에 두 줄의 돌기선을 둘렀고 그 좌우편에 방형의 주물구가 남아있다. 용뉴는 그 입을 천판 위에 붙이고 있으나 앞으로 살짝 들린 윗입술 안에는 몇 개의 이빨과 뒤로 솟은 갈기, 비늘이 장식된 짧고 가는 목이 표현되었고 뒤쪽에 솟은 가는 음통은 1/3 정도만이 남아있다. 섬약한 용뉴와 구획이 불분명한 도식적인 음통의 문양 표현에서 통일신라 9세기 이후 범종의 쇠퇴 과정이 느껴진다. 현재 용뉴의 왼쪽 손목 위쪽 부분이 부러져 결실된 상태이다.

종 몸체의 외형은 아래로 가면서 약간 넓게 퍼진 느낌을 주고 있으나 그 종구(鐘口) 부분은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모습이다. 폭이 좁은 상대와 하대는 구획된 부분만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으나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전혀 문양이 시문되지 않은 점이 색다르다.

아울러 상대 아래 붙은 연곽대에는 상원사종(上院寺鐘, 725년)과 마찬가지로 반원으로 된 연속문양 안에 비천상을 두고 그 여백에는 불꽃으로 구성된 보주와 당초문을 섬세하게 장식하였다. 이러한 문양은 다음 호에 소개될 코묘우지 종의 연곽대에도 신장상(神將像)과 당초문을 표현한 점에서 상원사종과 같은 8세기 종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두 종의 유사성이 더욱 느껴진다. 그리고 사방 연곽 안에 표현된 9개씩의 연뢰는 연판 위에 높게 돌출된 연꽃봉우리 형태이지만 두 방향의 연뢰가 3개씩 탈락되어 현재는 30개만 남아있다. 이 종이 통일신라 종이란 점을 부각시켜 준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은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몸체 중간쯤의 앞, 뒷면에 각 한구씩 표현되었다.

이렇게 앞, 뒷면에 한구씩으로 줄어든 주악천인상은 833년에 제작된 일본 죠구진자(尙宮神社) 소장 연지사종(蓮池寺鐘, 833년)에서 처음으로 등장되어 이후 제작된 통일신라 종의 주악상에 주요한 양식적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운천동 출토 종의 주악상은 구름 위에 앉아 천의를 날리며 비파(琵琶)를 연주하는 1구의 주악상을 두었고 그 반대편에는 합장한 채 입 앞으로 피리(縱笛)을 부는 모습의 천인상을 부조하였다.

특히 이 주악상 부분은 처음에 잘 보이지 않던 부분이었으나 보존 처리를 완료하고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피리를 부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코묘지종과 운천동의 비파를 연주하는 주악상은 크기나 형태, 자세 등은 물론이고 천의의 표현도 거의 동일하여 이 두 범종이 같은 공방(工房) 내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점을 시사해준다.

9세기 전반까지의 범종 주악상이 생황(笙篁)과 옆으로 부는 횡적(橫笛)을 부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에 비하여 운천동 종과 코묘지 종에 모두 비파라는 새로운 악기가 등장된 점은 9세기 중엽 주악상에도 새로운 변화를 반영한 과도기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천인상 바로 아래의 종신 하단부에는 주물 접합선으로 보이는 융기선이 한줄 돌려져 있는 점이 주목된다.

‘주악천인(종적)’ 탁본.

이러한 주물 접합선은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대형 종의 경우 몸체를 반으로 나누어 주조한 흔적이라 볼 수 있지만 이처럼 1m도 채 되지 않는 범종을 반으로 나누어 주조한 것은 주조 기술의 퇴보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신 하부 쪽에 치우쳐 앞 뒤쪽 두 곳에 배치된 원형 당좌는 종 전체의 비례에 비해 다소 크게 표현된 편이며 다른 문양에 비해서도 비교적 섬세하다. 당좌는 가장 내부의 자방(子房) 안에 1+7과의 크고 작은 연과(蓮顆)를 배치한 뒤 이를 12엽의 복판의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그 바깥 외구에는 유려한 연당초문(蓮唐草文)을 둥글게 돌아가며 시문하였고 이 전체를 두 줄의 융기선을 둘러 원권(圓圈)으로 감싼 모습이다. 이렇게 통일신라의 화려한 수막새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모습의 당좌는 코묘지 종의 당좌와 거의 동일한 모습인 점에서 당시 동일한 문양판(文樣板)이 사용되었거나 전승된 점을 시사한다.

비록 이 범종은 명문은 없으나 출토지가 분명한 통일신라 범종의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이 범종의 출토를 계기로 동일한 문양을 지닌 코묘지 종의 가치를 다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쇠북에 새겨진 구양사란 절에 대한 조사와 주변 절터와의 연관성 등도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 어떤 이유로 종 안에 이러한 불교공예품을 함께 매납한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의문도 풀어야할 과제 중에 하나이다. 

* 운천동 종과 동반 출도퇸 쇠북의 명문은 판독이 정확치 않아 기사, 기축을 같이 써도 무방하다고 합니다.(최응천 교수)

 여음(餘音)

고려시대 어느 시기인지 모르지만 이 일괄 불교 미술품은 절에서 소중히 간직한 명문 있는 쇠북과 향완, 특히 금동보살입상을 보호하고자 당시에 사용하던 범종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어 땅속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000년 가까운 세월 만에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지만 내부에 넣어졌던 유물보다 이를 보호를 목적으로 넣어졌던 통일신라 종이 더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 우리나라에 단 한 점 밖에 남지 않은 완형의 9세기 범종이란 점에서 이 종만이 보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불교신문3299호/2017년5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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