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도 자기 이익과 관련되면 결국

욕심 발동, 판단 그르치는 경우 있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역량 키우면 

의사결정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해

“제가 모의 주식 투자를 하면 수익률이 40%가 넘거든요. 1등으로 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제 돈을 가지고 투자하면 수익률이 뚝 떨어져요.” 이 말은 유능한 펀드 매니저가 한 말이기에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펀드 매니저는 누구보다도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전문지식도 돈을 버는 데는 별로 기여하지 못한 셈이다.

전문가 중에서도 전문성으로 접근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다. 그는 여러 가지로 천재적이며 약간 괴짜적인 측면도 있는 학자였다. 당시는 영화가 아직 압도적인 대중문화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유명 연극배우가 오늘날의 영화배우 같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케인즈는 유명 연극배우에게 반해서 매일 꽃다발을 보내며 구애한 끝에 그 배우와 결혼에 성공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면서 어느 주식이 좋을까 판단했는데 판단의 기준은 뜻밖에도 전문성이 아니었다.

케인즈는 “주식 투자란 미인대회와 같다. 내가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미인으로 선출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미인으로 선출된다”고 말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내가 ‘이 주식 정말 좋은데…’라고 선택해 봐야 남들이 그 주식을 사지 않으면 그 주식은 오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할 때 별 볼일 없는 주식이어도 대중이 좋다고 생각하면 오른다. 케인즈는 남이 무슨 주식을 더 좋아할까를 신문을 보며 판단했고 그는 이런 일을 ‘두뇌 체조’라고 불렀지만 주식에 대한 전문지식을 적용한 것은 아니다. 누가 어떤 주식을 더 좋아할까 알아내기 위해 신문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모의 주식 투자를 하면 수익을 40%까지 올리는데 왜 자기가 직접 주식에 투자할 때는 성공하지 못할까?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 모의 주식 투자를 할 때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치우치지 않고 판단할 수 있던 전문가가 자신의 이익이 관련되면 자세가 흐트러지고 욕심이 발동한다. 이익을 더 내고 싶을 때 장밋빛 꿈을 꾸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다. 장밋빛 꿈을 꿀 때는 장밋빛 자료만 보이고 다른 자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의사결정 오류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오류의 원인은 많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무언가에 유혹되거나 영향을 받아 판단을 그르치는 것이다.

나는 불교에 처음 입문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이 ‘깨달은 사람은 어떤 징표가 있을까’였다.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자칭 깨달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도인들이 많다. 그 중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어떻게 알까? 도법스님이 “깨달았다는 사람이 더 이기적이고 더 못된 짓을 하니 깨달았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일갈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더 깨달은 사람을 판별하는 법이라도 있을까 싶었다. 불교 공부를 하며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읽다보니 드디어 징표에 대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깨달음의 징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의 징표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돈오입도요문론>에도 깨달은 사람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장밋빛 꿈을 꿀 때도 장밋빛 자료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절에 우리가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사실 영원히 불가능하며 우리는 깨닫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 아닐까? 깨달음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도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깨달음의 길에 첫걸음을 내딛으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첫걸음을 내딛으면 이미 절반은 간 것이라는 초발심의 위력도 있지 않은가? 물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조금 생긴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모든 의사결정에 오류가 없이 완벽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기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인과 연이 화합해 결과를 이룰 뿐이지,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여실지견의 역량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의사결정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부지런히 정진하자.

[불교신문3300호/2017년5월27일] 

윤성식 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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