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원로의원 암도스님

원로의원 암도스님.

설법 제일 ‘부루나 존자’ 별명

서울 부산 대구, 전국구 활약

포교 30년 동안 6000회 법문

 

“포교는 내게 수행이자 불교”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명확,

윤리‧도덕적 답 줄 수 있어야”

“내가 ‘암도’라는 중이오.” 더도 덜도 없는 한마디. 스님은 원로의원이라는 묵직한 소임답지 않게 짧고 명쾌한 자기 소개부터 꺼냈다. 근황을 묻는 말에도 “뭐 특별할 게 있나. 매일 아침 예불로 시작해 참선으로 끝나지. 그러다 토목 공사도 좀 하고, 채소도 좀 심고 풀도 가끔 베고, 때때로 법문 탁발도 나가면서 그렇게 살지”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종단에 들어와 반평생을 포교 일선에서 활동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구로 하루에도 몇 번씩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이 시대 ‘부루나 존자’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을 만큼 법무부, 공공기관, 기업체 등 엔간한 데는 전부 갔다. 법문을 하기 위해 출가를 했나 싶을 정도로 입담꾼에 만능 재주꾼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지금까지 설한 법문만 6000번이 넘을 것 같다”는 스님은 천생 포교사일 것 같지만 사회와는 신문배달부로 처음 마주했다.

암도스님은 “13살 때부터 신문 배달만 5년을 했어. 광주 송정리에 안 가본 곳이 없었지. 그러다 독한 감기에 걸리게 됐는데 아, 학교 선생님이 절에 들어가서 단식을 하면 낫는다는 거야. 그래서 보광사로 들어갔지. 그런데 단식을 하다 보니 힘이 빠지지 않아? 시간이 지나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굶어 죽을 것만 같고. 그래서 주지 스님한테 한마디 했지. ‘스님, 인생은 진짜 무상한 것 같습니다’ 하고. 그게 시작이 될 줄 몰랐지.”

‘인생 무상’이라 툭 내뱉은 한마디에 ‘건방진 놈’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놈이 무상이 뭔지를 아느냐? 무상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쥐콩 만한 것이 무슨 불교를 안다고...”하는 주지 스님의 마디마디 말에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일었다.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하니 주지 스님은 손바닥만한 <천수경>을 손에 쥐어줬다. 아는 바 없이 ‘정구업진언’을 외웠다. 몸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더니 다음엔 마음이었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엔 끝없는 질문과 생각들이 가득했다. 신문 배달을 하며 틈나는 대로 신문을 읽고 소설을 탐독하며 낭만파 소설가를 꿈꿨던 소년의 꿈은 거기서 멈췄다. 17살 소년은 풋풋한 첫사랑이 아닌 ‘부처님 법’ 생각하느라 매일 밤 뜬 눈으로 지샜다.

“그 길로 백양사로 출가를 했지. 그런데 어른 스님들이 ‘학교나 마치고 오라’는 거야. 그래서 학교를 다시 갔어. 내친김에 군대도 다녀오고 사회생활도 좀 했지. 그리고 나서 25살 때 다시 백양사로 들어갔어. 두 번 출가한 꼴이지.”

먹고 살기 힘든 때였다. 사찰도 다름없었다. 수행에 전념하기보다 사찰 살림 돌보느라 바쁜 때였다. 공부는 뒷전에 두고 사찰에서 일만 죽어라 하던 암도스님을 지켜보던 어른 스님들이 또 한마디 했다. “안되겠다. 공부 좀 더 하고 오너라.” 30살, 확고히 마음을 세울 나이, 동국대에 들어가 뒤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등록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어. 종비생이었으니까. 휴학 한번 없이 4년 공부를 했고, 나중에 대학원에 들어가 박사 과정까지 마쳤으니 지금 세대에 비하면 복 받은 거지. 그리고 나서 종단에서 감찰국장을 맡으면서 소임을 시작했는데 부처님법 알리는 일이 참 재미있더라고. 지금까지 한 법문 숫자만 세도 6000번은 넘을 거야 아마.”

종단에 들어와 30년, 포교하는 재미로 몸에 탈이 나는 것도 모르고 전국 팔도를 다녔단다. 암도스님은 “법문을 하다보면 입에 막 재미가 붙었다”며 "말하는 사람 스스로 즐거우니 듣는 사람도 재미있게 들어줘 그 재미에 살았다"고 했다. 10여 년 전 건강이 나빠져 암자로 들어가기 전까지 대중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스님에게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런 스님에게 포교는 곧 수행과도 같다.

“옛날이고 지금이고 사회가 불교에 바라는 것은 단 두 가지 밖에 없어. ‘수도와 수행’뿐이야. 수도는 자기완성이고 수행은 사회완성이라고 보면 돼. 생각과 말을 바르게 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으며 모범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것도 좋지만, 수행은 실천 없이 힘든 부분이 있어. 맨날 앉아만 있으면 뭐할 것이야. 부처님처럼 수행하고 나면 나가서 베풀어야지.”

과거에 비해 분명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됐지만 삶은 더 못쓰게 된 현 세태. 종교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스님은 물질주의, 향락주의에 물든 지금의 사회에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하다고 했다. “지금 사회를 보면 종교가 마치 무슨 정치적인 것처럼 비춰지는 데 이건 맞지 않아. 정치와 종교는 명백히 분리돼야하는 것이 맞아.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 또 불교에 요구하는 것은 정신세계에 대한 부분이거든. 불교가 윤리, 도덕적 문제에 있어 답을 줄 수 있어야 해. 불교의 근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 견성성불에 있다는 점을 절대 잊으면 안 돼. 그런데 가장 기본을 잊어버려요. 스님도 그렇고 불자들도 그렇고 대오각성해야 해.”

“불심이 없고 불교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를 못하니 출가를 안하려고들 하는 것이다” “선방에서 100년을 있으면 무엇하나, 초등학교 100번 졸업하는 것이랑 똑같지. 사회에 직접 나가 부딪혀야 한다” 등 걱정거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 모든 건 결국 우리가 잘못해서”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숨 한번 어떻게 쉬는 지도 몰라요. 호흡하는 법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자연스레 알고 있던 건데 말이지. 불교 공부 어려울 것 하나 없어. 숨 하나 잘 쉬고 숨 하나 못 쉬는 것 아는 게 공부고 수행이여. 잡생각이 자꾸 나고 번뇌가 들끓듯 하니 안되는거지. 신구업 3업을 청정히 하고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자꾸 살펴야해요. 그걸 모르면 안돼.”

경찰서에서 법문을 하던 때 “스님이 도사면 우리도 도사요”하며 이죽거리던 사람들 앞에선 조지부시 전 미국 대통령 일화를 들려주며 무례를 재치로 넘기고, 박사 학위 수여자들이 넘쳐나던 중앙공무원교육기관에 초청받았을 때는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싸늘한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던 스님에게 포교는 곧 수행이다.

어려운 한문 공부하기보다 지금 한 순간 숨 한번 쉬는 법부터 배워보라던 암도스님은 수행자들에게 애정 어린 한마디도 덧붙였다. “인욕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에요. 철저히 풀지 않으면 찌꺼기가 남아요. 만사가 일체유심이라. 잘못이 있으면 찾아서 풀고 미움이 있으면 응어리가 남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안 그러면 속이 곯아요. 이론만 알지 실제로 써먹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부디 철저히 수행 하시길 바랍니다.”

암도스님은...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천운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년 덕림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4년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서른이 넘는 나이에 동국대 불교학과에 뒤늦게 입학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동국대 강사와 중앙승가대 교수, 조계종 교육원장 등을 지냈다.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 불법홍포에 앞장섰으며,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 총무원 포교원장, 교육원장 등 종단 내외의 크고 작은 소임을 맡은 후에는 백양사 운문암과 청량암 등에서 정진했다. 이후 담양으로 주석처를 옮겨 13년째 마하무량사를 직접 손으로 가꾸고 있다. 마하무량사 대웅전 현판과 주련에는 “나쁜짓 하지말고, 좋은 일에 힘쓰며, 참나를 깨달아서, 모든 중생 가르쳐, 불국토를 이룩하라”고 써 있다. 암도스님이 늘 가슴에 새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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