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많은 애벌레들이 

산책로를 가로질러 

언덕 쪽으로 온힘을 다해 

기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전거가 애벌레의 보행을 

스칠 듯 질주했다. 악!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안거’의 마음이 고맙다 

초복이었다. 무더위가 누그러진 초저녁 천변공원에서 갈댓잎에 달려있는 매미 허물을 보았다. 왜 흔들리는 갈댓잎에 매달렸을까. 다가가 보니 허물이 아니다. 수액을 빠는지 ‘대롱 입’을 꼭 박은 채 갈댓잎을 부여잡고 살금살금 뒷다리를 움직이는 애벌레. 

유충의 집을 벗고 매미가 되려는 애벌레는 힘이 달렸는지 모른다. 물가 풀밭 무른 땅에서 나와 큰키나무로 기어올라 안착하려면 개미떼 같은 천적을 만나 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제 형편껏 가까운 갈댓잎에 매달린 거였다. 제 힘껏 등을 터서, 짧게는 3년 길게는 17년 동안 만들어온 연둣빛 몸 날개를 환히 밀어 올리겠지. 아직 등이 갈라지지 않은 애벌레를 서너 시간 지켜보기엔 인내심이 부족했다. 

며칠 뒤. 어김없이, 이른 저녁을 먹은 사람들이며 자전거나 전동보드를 즐기는 사람들로 산책로는 흥성거렸다. 요즘 천변에서 달팽이 보기는 쉽지 않지만 부산한 개미들이나 지렁이가 가끔 발길을 살피게 했다. 그날은 유난히 많은 애벌레들이 산책로를 가로질러 느릅나무 벚나무가 늘어선 언덕 쪽으로 온힘을 다해 기어가고 있었다. 든든한 나무기둥을 붙잡고 어른 매미로 탈바꿈하려는 거다. 그때였다. 자전거가 애벌레의 보행(步行)을 스칠 듯 질주했다.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살펴보니 길바닥엔 애벌레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다. ‘로드 킬’은 산짐승만 당하는 게 아니다. 

연둣빛 몸 날개를 반 이상 드러내고도 주검으로 뒹구는 애벌레가 있는가 하면, 으깨져 체액을 흘리는 애벌레도 있다. 고작 보름을 살다 가려고 수 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다 열다섯 번은 몸을 바꾸어야 땅위로 나온다는 애벌레. 저 애벌레도 허물 벗고 날개 달고 매미울음 크게, 짝 한번 크게 불러보지도 못하고, 알 한번 슬어보지도 못하고 가기도 하는구나. 그런 것이 사람의 일만은 아니구나. 

매미가 얌전히 벗어두고 간 빈 집을 본다. 매미가 빠져나갔는지 아닌지 모르게 갈라진 등은 아물듯 가까이 붙어 있다. 산통을 겪은 건 매미일까, 허물일까. 매미는 왜 하필 매미로 태어났을까. 암흑을 뚫고 올라와 우화등선, 매미가 되어 날아가며 남겨둔 허울의 흉허물은 무엇일까. 비어 있는 집 한 채.

“신/ 벗어두고/ 간 데 없이 간 사내처럼/ 영산홍 꽃 다 진 잎가지나 붙들고/ 목소리 간 데 없는 매미, 비어 있는/ 집 한 채// 마음을 넘겨버리고/ 울도 못하는 저 허깨비// 잃은 건 노래 아니라 너에게 가는 날개여서// 일평생 몸을 바수며/ 너는 네가/ 그립다.”(홍성란의 시 ‘허물’)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안거는 우기 때에 밖에 나가게 되면 생동 번성하는 초목과 벌레들을 자신도 모르게 밟아 죽일까 두려워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는 인도 불교의 우안거(雨安居)에서 유래했다. 자신도 모르게 살생을 저지르는 잘못을 피하고, 그렇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익히며 몸소 사는 공부. 발길도 살펴 놓으라는 안거의 마음이 고맙다. 

[불교신문3317호/2017년7월26일자] 

홍성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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