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좌절과 희망 동시에 어린 '천년고찰'

1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예산 향천사. 효성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포교도량으로서의 역량이 부쩍 커졌다.

의자왕 재위시 의각스님
1500부처님 모시며 창건
현재 예산군 지명 ‘기원’

향천사불교대학 개원하며
지역사회 불교 알림이 ‘톡톡’
‘거사림회’ 헌신으로 발전

10월28일 오후 7시
개산대재 산사음악회

 

덕숭총림 수덕사 말사인 향천사(주지 효성스님)는 본사인 수덕사와 함께 충남 예산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향천(香泉)’의 시작은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백제의 좌절과 희망이 서린 공간이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 12년(652). 신라 무열왕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의각(義覺)대사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스님은 백제사에 머물렀는데 그 기골이 장대해서 키는 8척이었고 눈빛은 형형했다. 매일 밤 <반야심경>을 읊었는데 그때마다 오색의 빛이 스님의 몸을 감쌌다. 일본인들은 귀한 선승이 오셨다며 극진히 모셨다.

그해에 중국 당나라로 발길을 옮긴 의각대사는 구자산에 있으면서 석불 3035위를 비롯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삼존상과 16나한상을 3년에 걸쳐 조성했다. 의자왕 16년(656). 4년간의 만행을 마치고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 그간 외지에서 조성한 불상들이 ‘돌배(석재를 운반하던 선박)’에 실렸다. 바다 건너 백제 땅 오산현 북포해안에 도착했다. 이 포구에서 몇 개월을 머무니 여기를 석주포라 일렀다(현재의 충남 예산군 장소리). 또한 스님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배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며 예불을 올렸는데 이때의 종소리에서 ‘선암면 종경리’라는 오늘날의 지명이 정해졌다.

천불전 안에 봉안된 1500여 옥돌 부처님.

금까마귀와 관련된 이적으로 향천사의 창건설화는 정점을 찍는다. 예불을 올리던 중 금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대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를 상서롭게 여긴 의각스님은 금까마귀가 날아가는 쪽으로 쫓았다. 스님을 오산현의 남산으로 이끈 금까마귀 암수는 홀연히 사라졌다. 스님은 이를 사찰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라는 계시로 여겼다. 불사를 마치고 나니 다시 금까마귀가 그 산의 상봉에 나타났다. 아랫마을의 작은 샘에서 물을 마시고는 또 다시 사라졌다.

신비한 새가 출몰을 반복하니 호기심이 난 사람들은 새가 물을 마시는 샘을 찾아갔다. 샘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여기까지가 금오산(金烏山) 향천사(香泉寺)의 유래다. 곧 향천사는 예산군의 역사와 함께해온 천년고찰임을 일러주는 옛이야기다. ‘한국불교는 곧 대한민국’임을 가르쳐주는 전설이기도 하다. 한편 백제는 향천사가 창건된 지 4년 만에 멸망했다(서기 660년). 어쩌면 ‘금까마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왕조의 앞날을 슬퍼하며 백제의 창공을 날았는지 모른다. 의각스님의 불사는 백제의 재건을 바라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나라는 사라지고 절은 남았다.

실제로 의각스님이 모셨던 불상 가운데 1510위의 옥돌 부처님은 천불전에 지금까지도 모셔져 있다. 16나한은 나한전에 있다. 천불전 근방에 세워진 의각스님의 부도는 당신의 비범했던 정진력을 증명한다. 향천사는 지난 4월 경내 서선당에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주관으로 향천사의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전적, 불교회화, 석조부도 등의 문화재적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중형 크기의 불상이다. 불상 양식과 변천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인 데다 작품성도 뛰어나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향천사는 이토록 유서 깊은 절이나 외진 절이었다. 2015년 효성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지역민에게 다가서는 포교도량으로 변모하고 있다. 스님이 절을 맡으면서 최초로 한 일은 불교대학 개원이다. 향천사불교대학은 올해 포교원 인가를 받은 정규 불교대학이 됐다. 신해행증(信解行證). ‘불교를 믿으려면 일단 불교를 알아야 하고 불교를 알아야 진정한 불자로서 실천할 수 있다’는 게 당신의 지론이다. 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초기경전의 이해’ ‘붓다 한 말씀’ ‘불교문화와 불교신앙’ ‘대승불교의 이해’ ‘인도철학과 불교’를 수강한다.

불교대학에 힘입어 형성된 결집력은 사찰의 지역 내 위상 강화로 직결된다. 11월18일 신도들과 합심한 결실인 석조 약사여래불상을 경내에 봉안할 예정이다. 사찰의 창건일을 기념하는 개산대재도 한층 성대해졌다. 지역 주민들에게 흥겨운 하루를 선물하는 산사음악회 형식으로 거행된다. 오는 10월28일 오후 7시 경내 특설무대에서 진행되며 불자 래퍼 아웃사이더, 트로트 가수 신유를 비롯해 금잔디 조항조 등이 공연한다. 과거가 아름답고 현재가 알찬 사찰 향천사. 포교에 대한 열정 덕분에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예산=장영섭 기자

 

천불선원 안에 위치한 천불전.
향천사불교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신도들.
향천사 신도조직인 서예반

 

“사부대중과 더불어 불교를 널리 알리겠다”

향천사 주지 효성스님

효성스님

경허․만공스님의 선풍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수덕사의 말사인 향천사는 천불(千佛)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안거 때마다 14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극찬해마지 않았던 의각스님을 꿈꾸는 납자들이 찾아든다. 주지 효성스님은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를 지낸 법정스님의 상좌다. 향천사 회주인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사찰을 지역불교 발전의 전진기지로 환골탈태시켰다. 올해 포교원 인가 정규불교대학으로 개원한 향천사불교대학에는 생활불교를 뿌리내리기 위한 스님의 원력이 짙게 묻어난다.

향천사의 또 다른 자랑은 향천유치원이다. 예산군의 대표적인 유치원으로 30년 이상 지역의 미래세대를 키우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원아들은 지난해 직접 만든 연등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부처님오신날 불우이웃들을 위해 써달라며 30여만 원의 성금을 내놓아 어른들을 감복시키기도 했다. 효성스님은 “저출산으로 인해 특히 농촌에선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라면서도 “향천유치원을 졸업하는 아이들이 훗날 한국불교의 주역이 되리란 믿음으로 부지런히 선근(善根)을 심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향천사 창건설화에는 불사를 도운 ‘흰 소’가 등장한다. ‘이때 불심이 깊은 사람이 흰 소 한 마리를 끌고 와 수많은 불상을 모시는 일을 도왔다. 그가 성심으로 임하니 7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무리하게 노동한 흰 소는 아쉽게도 기력이 다했는지 큰 소리로 한번 울부짖고는 바위 앞에서 죽고 말았다. 그를 가엾게 여긴 백성들은 바위의 이름을 ‘고함암’이라 기렸다(현재 예산군 향천리).

어쩌면 거사림회는 그 옛날 ‘흰 소’의 재림이겠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남성 재가불자들이 가람 수호에 헌신적이다. 향천유치원도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일절 받지 않고 오로지 거사들의 십시일반으로만 지었다. 효성스님은 “직접 벽돌을 나르고 삽을 뜬 것도 모두 거사림회 어른들이었다”며 “사부대중의 공의를 수렴해 농촌불교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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