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원로의원 원경스님은 “한 사람의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부처님 법은 이어지는 것”이라며 “부처님을 믿는 모두가 승보이며, 승보는 화합 대중이다. 스스로가 거름이 될 때 화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부처님 법은 이어지는 것
부처님 믿는 모두 승보
승보는 화합 대중이다

수행자들이 곳곳에서 나올 때
불교 발전할 수 있을 것
죽기 전에 한 생각 어떻게
챙기고 가느냐 그것이 중요”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조계종 원로의원 원경스님이 주석하는 평택 만기사 천왕문에 적혀 있는 문구다. 중생들의 생각으로는 은혜는 쉽게 잊히고, 원수는 쉽게 잊기 어렵다. 누가 잘 해준 기억은 오래가지 않아도 잘못했던 일은 두고두고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짧은 문구가 가슴에 남았다. “특별히 말할 것이 있나요? 차나 한 잔 하시죠.” 지난 7일 원로의원 원경스님을 평택 만기사에서 만났다.

평생을 묵묵히 수행자의 길을 걸어 온 원경스님. 원경스님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비운의 혁명가, 이정 박헌영 선생의 아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 근·현대사가 순탄치 않았던 것처럼 원경스님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공산주의’라는 말이 금기였던 시절이었다. 원경스님은 입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살아야만 했다. 가슴 아픈 가족사는 수행의 원동력이 됐다.

원경스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한(恨)’이다. 참회기도와 하루 3000배씩, 1년에 100만 배를 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가슴 깊이 사무쳐 도무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한이 차츰 옅어져 갔다. 어지럽던 마음도 안정됐다.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는 문구는 만기사를 찾아오는 이들을 향한 원경스님의 당부이자 스스로를 위한 다짐이었다. 스님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평생을 두려움과 압박 속에서 살았습니다. 누구(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등진 채 농사지으며, 수행하며 그렇게 살았죠. 수행과 농사를 벗 삼아 10년을 지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부처님 품에서 시줏밥을 먹으며 살아남았죠. 아버지는 아버지의 운명이, 내게는 내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원한이 사라지자 선친에 대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86년 당시 변호사였던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했다. 직접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학자들과 함께 박헌영 선생에 대한 자료도 모았다. 고종사촌 형이자 선친과 함께 했던 동지,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한산스님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선친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스님에게는 그 일이 곧 수행이었다. 그렇게 10여 년간 모은 자료를 정리해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이후 전집을 바탕으로 박헌영 선생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6권으로 된 <만화 박헌영> 제작, 발간에 앞장섰다. 앞으로 해방정국과 월북 이후의 삶을 담아 추가로 3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스님에게 불자 인구 감소 문제와 불교 발전에 대한 방도를 청했다. 원경스님의 답은 짧고 명확했다. “한 사람의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부처님 법은 이어지는 것”이 답이었다. 스님은 “불자 인구가 300만 명이 감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한 사람이라도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모범이 나올 때, 참 도인이 나올 때 불교는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고 역설했다.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스님은 다른 입장을 밝혔다. “부처님 믿는 것 자체가 기복”이라는 말이었다.

스님이 바라는 세상은 “남을 인정하고 베풀 수 있는 사회”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한과 세상의 차디찬 시선을 온몸으로 겪으며 평생을 살아온 스님이기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함께 화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최근 적폐청산 주장 등 종단 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질 않았다.

“중은 남의 허물을 건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안아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른 스님들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어른 스님들은 항상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모두가 승보입니다. 승보는 화합 대중입니다. 스스로가 거름이 될 때 화합할 수 있습니다. 화해와 화합은 스스로를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후학들과 불자들을 위해서도 “끊임없는 수행”을 당부했다. 원경스님은 “누구 보라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했다고 수행은 끝이 아니다”며 “죽을 때까지 수행하고 구도해야 한다. 죽기 전에 한 생각 어떻게 챙기고 가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수행자들이 곳곳에서 나올 때 불교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해원탑으로 향했다.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선친과 함께 했던 동지들을 위해 원경스님은 만기사 경내 한 편에 ‘해원탑(解寃塔)’을 세웠다. <만화 박헌영>이 추가 작업이 완료되면 <박헌영 전집>과 함께 탑에 봉안할 예정이다. 박헌영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때 우리사회 이념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원경스님은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이다. 이념 갈등은 남북이 통일된 이후에도 계속 지속될 것”이라며 “세대가 바뀌고 새로운 생각들이 나와야 해결될 일”이라고 밝혔다.
 

평택 만기사 한 편에 조성된 해원탑을 참배하고 있는 원경스님.

■ 원경스님과 이정 박헌영 선생

순탄치 않은 삶…수행자의 길 묵묵히 걸으며 극복

원경스님은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이정 박헌영 선생의 혈육이다. 박헌영 선생이 월북하기 전인 1941년, 두 번째 부인 정순년 씨가 낳은 아들이다. 박헌영 선생은 조선공산당 최고지도자였다. 1946년 남로당 창당 후 미군정에 쫓겨 월북한 뒤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에 올랐지만 6·25전쟁 직후인 미국의 스파이라는 죄목 등으로 붙잡혀 처형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임에도 남과 북 모두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박헌영 선생으로 인해 원경스님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부친이 월북한 이후 어머니와도 헤어진 원경스님은 고종사촌 형이자 박헌영 선생의 동지였던 한산스님을 만나 불가의 인연을 맺게 됐다. 해방전후 혼란했던 격랑의 시기 원경스님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원경스님은 한산스님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만나 산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1958년 한산스님으로부터 아버지의 행적과 죽음을 처음으로 전해 듣고는 충격에 빠졌다.

다시 절로 돌아온 스님은 가슴 아픈 가족사를 이겨내고 정진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과 전쟁의 경험은 더욱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하며 매진해왔다. 하지만 그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출생 내력은 스님으로 어디를 가나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73년 여주 흥왕사 주지를 맡은 이후 농사와 수행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수행자의 길을 걸어왔다. 원한이 가라앉고 난 뒤에는 박헌영 선생을 재평가하기 위해 작업에도 착수했다. 1993년부터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박헌영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아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또 2010년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현대사를 기록한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 출간하기도 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사회복지과를 수료한 이후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고 자비를 실천하기도 했으며, 경기도 지방경찰청 경승 등을 역임하며 지역 포교 활성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원로의원에 선출된 이후 남은 생을 종단과 종도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평택 만기사에 머물고 있다.
 

■ 원경스님은…

원경스님은 송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0년 용화사에서 사미계,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했다. 제10대 중앙종회의원, 흥왕사, 청룡사, 신륵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4년 4월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지난 2015년 1월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현재 평택 만기사 주지를 맡고 있다.

평택=엄태규 기자 che11@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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