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부처님도량, 불자들 순례할 날 오길”

지난 9일 만난 이형균 양평 현대블룸비스타 총지배인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신재호 기자

금강산 신계사에 한번 쯤 다녀온 스님이라면 이형균(56, 법명 금봉) 양평 현대블룸비스타 총지배인을 모를 수 없다. 독실한 불자인 그는 신계사를 찾아온 스님들 안내를 도맡았다. 직원들이 그를 ‘신계사 부주지’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는 불교 일이라면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왔다. 

2004년부터 2011년 철수할 때까지 그는 금강산에 근무하면서 신계사 복원불사에 많은 도움을 줬다. 신계사 복원 후에는 시간 날 때마다 절에 가서 기도했다. 새 정부 출범 후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요즘, 금강산 관광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이형균 총지배인을 지난 9일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새벽 5시30분 눈을 뜨면 가장 먼저 3배를 올린다. 반야심경 3독 후 의상조사법성게 화엄경 약찬게를 차례로 독송한 후에는 발원문을 외운다. 제가 근무하는 호텔을 도량으로 여기고 ‘이 도량에 오시는 모든 부처님들 한 마음으로 하나 돼 돌아갈 수 있기를, 잠자리, 공양 맛있게 드시고 돌아가길’ 발원한다. 기도를 끝내면 사찰에서 도량석을 하는 것처럼 호텔을 한 바퀴 돈다. 흐트러진 의자를 바로 하고 어질러진 곳은 없는지 살펴본다. 

“처음엔 내가 왜 이런 걸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잠깐 마음을 돌리면 직장생활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내가 조금만 수고로우면 우리 고객들이 평안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면서 마음이 바뀐 것이다. 직원들에게도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 대신 실천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낀다. 무엇보다 긍정적이 됐다고 한다. 직원들이 실수했을 때 예전 같으면 화를 먼저 내겠지만, 요새는 아니다. 따끔한 지적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채찍보다 당근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믿음으로 직원들 기를 살려준다. “으쌰 으쌰” 분위기를 띄워 좋은 기운이 나쁜 기운을 덮을 수 있게 하는 것이야 말로 그가 생각하는 관리자의 역할이다.

수행을 하다 보니 그는 자신이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해 30여 년을 호텔리어로 살면서 평생 서비스업에 종사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진상고객을 만날 때도 있는데 오히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컴플레인 하는 고객입장에서 생각하면 크게 부딪힐 일이 없다. 어렵게 오신 분들이니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이라고 답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다른 직종에 근무했다면 지금처럼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을 하다 보니,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지 상대가 금방 알아차린다. 그래서 늘 깨어있을 수밖에 없다. 제 스스로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기도 쉽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만약 이 공부 안했으면 범인으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아찔한 마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포교할 수 있는지도 고민한다. “현대그룹 계열사인 블룸비스타는 교육연수와 호텔이 복합된 시설인데 연간 30만 명이 이용한다. 이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좋은 가르침 전하고 싶어서 스님들 게송을 적은 서예작품을 전시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연기, 인연을 주제로 한 전시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거다’ 하는 생각에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그는 기도하는 힘을 믿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기도해서 얻은 힘 덕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특히 경주현대호텔에서 일할 때 기도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밀양의 한 스님과 인연이 닿아 함께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님이 괴각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수행한다고 얼음을 깨고 계곡물에 들어간 적도 있다.(웃음) 오늘 1만 배를 할 건데 경주거사는 1000배, 보살은 3000배 이렇게 정해줘 절을 올리는 식이다. 덕분에 절수행부터 아비라기도, 다라니기도 등 안 해본 기도가 없다.” 

이후 서울 금강선원을 다니며 유식을 공부한데 이어, 안양 한마음선원에서 마음공부를 하며 꾸준히 신행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아내와 자녀들은 그의 든든한 도반이다. 특히 둘째 아들은 취사병으로 복무하던 때 “이 국을 먹고 힘내서 병사들이 병영생활 잘 하도록 기원한다”는 마음으로 국을 퍼 줄 정도로 독실하다. “가장이 중심을 잡고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저를 중심으로 식구들이 열심히 신행활동 하고 있다. 

지금은 첫째가 미국 유학 중이긴 하지만, 네 식구가 모이면 주제가 불교와 신행이다. 열심히 기도한 가피도 느꼈다. 둘째가 부대에서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돼 접합수술을 했는데 다행이 신경이 되살아나 지금은 다친 것 같지 않다. 의사도 놀라워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이 몸 받아서 남에게 도움 되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한다.”

선화를 보며 마음을 살피고, 거울로 외면을 들여다본다는 이형균 총지배인. 신재호 기자

금강산 근무 시절은 그에게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신계사에 가서 기도를 했고, 평일에도 시간만 되면 절에 가서 108배를 했다. 당시 도감이었던 제정스님도 만났다. 일반 관광객들이 가지 못하는 도량도 가봤다. 정양사 약사여래불을 친견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그는 금강산 절터를 다니면서 왜 금강산이 불교성지고, 옛 스님들이 왜 금강산에서 수행했는지 저절로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가장 많은 스님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신계사 복원불사를 끝내고 낙성식 때 전국에서 350여 명 스님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그는 감격스러웠다. 또 불사금을 희사하는 스님들의 통큰 보시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금강산을 방문하는 많은 스님들을 안내했는데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과 금강산 법기암에서 출가했던 혜해스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관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내금강을 안내했는데 그 때 제가 무릎을 꿇고 법명을 청했다. 스님은 즉석에서 금봉(金峰)이라는 법명을 주고 금강산에서 가장 빼어난 봉우리처럼 멋지게 살라고 덕담해주셨다. A4용지에 친필로 법명을 적고 낙관까지 찍어 줬는데 제 방에 잘 보관하고 있다.” 

이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지관스님을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청사에서 같이 공양을 했는데 그 때 스님이 용돈하라고 300달러를 줬다. 스님에게 용돈을 받은 게 처음이라 좋아서 아내에게 자랑했다. 스님에게 받은 내 돈이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아내가 그렇게 쓰며 안 된다고 알려줬다. 아차 싶어서 300달러로 이불을 사서 북측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금강산에 출가해 다시 돌아온 혜해스님도 종종 생각난다고 했다. 장안사가 있던 자리에 서서 ‘황성옛터’를 부르며 쓸쓸하게 눈물짓던 스님, 또 금강산에서 기도하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던 스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관스님처럼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는 “제 자신을 위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가 철수한 그는 금강산에서 자비와 보시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았다. 호텔에는 북측 일꾼 300여 명이 함께 일했다. 남과 북에서 태어났지만 금강산에서 일하면서 서로 정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집에서 만들어왔다면서 ‘지배인 선생 떡 좀 맛보라’며 나눠줬다. 절구로 빻아서 쌀알이 그대로 씹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또 송이 철에는 송이를 따와서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지배인 선생 송이 좀 드시라’며 한 포대를 가져다 줬다. 먹다먹다 라면에 송이를 넣어먹기도 했다. 우리에겐 그런 정이 있었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어려움이 닥쳤다. 남측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이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급하게 몸만 나간 터라 식자재는 남아 있었다. 그는 깡통 식용유를 생수병에 나눠 따르고, 반찬이며 양념류, 쌀 등을 검은 봉지에 담아 북측 일꾼에게 일일이 나눠졌다. “힘들게 생활하는 북측 사람들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식자재를 나눠줬다.” 마음을 담은 검은 봉지를 북측 사람들은 고맙게 받았다.

금강산을 뒤로 하고 이제는 양평 현대블룸비스타 운영을 책임지고 있지만 그에게는 금강산 관광재개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 “아쉽게 금강산을 떠나올 때는 반드시 돌아가야겠다는 집착이 있었다. 요즘엔 꼭 가야겠다는 생각도 욕심이란 걸 알아차렸다. 내려놓으니까 마음도 편해졌다.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금강산에서 근무한 이래 금강산호텔, 외금강호텔, 옥류관, 온정각 이산가족면회소를 개관하는 업무를 맡았다. 한 곳 오픈하면 다음 호텔 개관업무를 맡아서 많은 일을 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금강산 신계사처럼 불교계가 앞장서서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오지 않겠냐”는 기대를 전한 그는 “재가불자로서 제가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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