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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함께 한 벗 녹원 대종사에게

기사승인 2017.12.26  10: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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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 파계사 조실 도원 대종사 쓰다

영허당 녹원 대종사.

暎虛堂 綠園 大宗師 行狀

대종사의 법명은 녹원(綠園)이고, 법호는 영허(暎虛)이시다. 1928년 3월 4일에 경상북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에서 해주(海州) 오씨(吳氏) 세록(世祿)과 초계(草溪) 변씨(卞氏) 철이(哲伊) 여사의 차남으로 출생하셨으며, 속명은 인갑(仁甲)이시다.

대종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은 해인사(海印寺)에서 처음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던 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 만큼 전생부터 불연(佛緣)이 깊으셨다. 스님들만 보면 환희심이 솟았던 대종사는 엄부(嚴父)의 슬하에서 정훈(庭訓)을 익히던 시절에도 늘 절을 찾기 좋아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수행자의 길을 걷던 형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출가를 결심하셨다. 학문에 대한 갈증과 보람된 삶에 대한 열망으로 번민하던 소년 인갑에게 “대장부가 걸어볼 만한 길”이라는 형님의 한 마디 권유는 감로수와 같았다.

이에 크게 고무된 대종사는 13세 되던 해인 1940년 7월 15일에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동 직지사(直指寺)로 입산 출가하였고, 14세 되던 해인 1941년 4월 8일에 탄옹 화상(炭翁和尙)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셨다. 선(禪)과 교(敎)에 두루 정통했던 탄옹 화상께서는 선학원(禪學院)에 재원을 기부하여 조선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승가의 지도자이시고, 부처님의 일생을 연극으로 만들어 불교대중화에 앞장섰던 시대의 선각자이셨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곧 선정삼매(禪定三昧)였던 스승의 일상은 대종사의 평생을 비추는 귀감(龜鑑)이 되었고, “언제나 하심(下心)하고 과묵(寡默)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은 대종사의 평생을 이끄는 지남(指南)이 되었다.

대종사는 스승을 시봉하면서 직지사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5년간 수학하고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였으며, 선학원 중앙선원(中央禪院)에서 첫 안거를 보내고 직지사 천불선원(千佛禪院)에서 2안거를 성만하셨다. 그리고 21세 되던 해인 1948년 4월 15일에 한암(漢岩) 대종사를 계사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하셨으며, 이후 보문선원(普門禪院)과 천불선원 등지에서 7안거를 성만하셨다. 27세 되던 해인 1954년에 직지사 재무로 종무행정에 첫발을 디딘 대종사는 대구 대안사(大安寺) 주지와 직지사 총무 등을 역임하고, 1958년 2월 28일에 31세의 나이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승격된 직지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되셨다.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에 아도 화상(阿道和尙)께서 창건하신 직지사(直指寺)는 1600여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찬란한 문명을 창조했던 문화의 보고였고, 능여 조사(能如祖師)와 학조 대사(學祖大師)를 품고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영웅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배출했던 인재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명성은 전란의 화마와 함께 사라졌으니, 당시의 직지사는 썩은 기둥에 처마가 기운 여덟 동의 건물에다 살림살이를 학생들이 들고 오는 쌀말에나 의존하던 초라한 산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종사는 사원을 재건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결심하고 1958년 3월 20일 제1회 천일기도를 시작으로 직지사중창불사(直指寺重創佛事)에 돌입하셨다. 대종사는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해 사유지(私有地) 10,088평, 전답 12,627평, 임야 3,740평을 차례로 매입하셨다. 아울러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 박사에게 의뢰하여 산재하던 자료를 수집해 《직지사 사적기(直指寺事蹟記)》를 편찬하고, 이에 따라 체계적으로 사원을 정비하면서 전각(殿閣)과 당우(堂宇)를 하나씩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30년간 이어진 대대적인 불사로 직지사는 창사 이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가람의 면모를 회복하게 되었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찰 시설의 새로운 전범(典範)이 되었다.

매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고 공사(公私)가 분명했던 대종사의 처신은 곧 제방에 널리 알려졌고, 남의 허물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탓했던 대종사의 인품은 곧 종도들의 깊은 신망으로 이어졌다. 이에 종단에서는 난제가 있을 때마다 대종사에게 중책을 맡겼고, 그럴 때마다 대종사는 발군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셨다. 대종사는 1962년 2월 25일 불교재건비상종회 비구의원으로 선임되어 비구 대처 사이의 오랜 분쟁을 종식하고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을 발족시키는데 기여하셨으며, 1963년 11월 20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임된 이래로 누차 중앙종회 수석부의장과 의장 및 교구본사주지연합회장 등의 직분을 수행하며 종단발전에 기여하셨으며, 1984년 8월 1일에는 해인사(海印寺)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표자대회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셨다.

당시 종단은 문중 간의 반목과 불신으로 분규와 마찰이 끊이지 않아 6개월이 멀다하고 총무원장이 교체되던 혼란한 상황이었다. 대종사는 “10년 후에 돌아보아도 부끄럽지 않게 일하겠다” 공언하고 이해(利害)의 난맥상을 하나씩 풀어가셨다. 대종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종단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1985년 5월 25일 불기 2529주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에는 100만 불자가 여의도광장에 운집하는 장관을 연출하게 되었다. 탁월한 지도력과 강직한 성품으로 종도들을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이끌던 대종사는 총무원장에 추대된 지 2년째 되던 1986년 8월 20일에 총무원 부장스님들을 조촐한 식사에 초대하고 “이제 원장 자리를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표연히 황악산으로 돌아오셨다. 소임이 주어지면 피하지 않고 소임을 마치면 미련 없이 떠났던 대종사의 처신은 지금까지도 승가의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대종사는 평소 교육을 통한 불법홍포와 불자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다. 이에 1964년부터 20여 년간 학교법인 능인학원의 감사・이사・이사장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직지사・동화사・은해사 3개 본사의 소유 임야를 출자해 학원의 기본재산을 보강하셨으며, 1968년 8월 6일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에 선임된 이래 35년간 이사를 역임하며 헌신하셨다. 대종사는 1985년 1월 25일에 동국학원 이사장 직무대행에 피선되어 16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동국학원 이사장직을 수행하면서 동국대학교의 성장을 위해 여러 학과를 신설하고 건물을 신축하며 부대시설과 산하 기관을 꾸준히 확대시켰으며, 일본・중국・미국・호주 등의 유수 대학과 자매결연하여 동국대학교를 세계적인 불교학의 산실로 성장시키셨다.

대종사는 1984년 4월 1일 갑작스런 쇼크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 일이 있었다. 심각한 저혈압에 심폐기능마저 저하되자 본사에서는 다비준비에 들어갔고, 병문안을 온 고승들은 하나같이 “아까운 수좌 하나를 잃었다”며 한탄하셨다. 대종사는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순간에도 만나는 스님들마다 손을 붙잡고 맹세하셨다.

“평생 승려의 길을 걸었어도 아프면 앞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뒤에는 십자가가 서있는 기독교병원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1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제가 혹시라도 살아난다면 꼭 현대적 의료시설을 갖춘 불교병원을 짓겠습니다.”

대종사는 기적처럼 살아나셨고, 이후 동국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의과대학을 신설하고 경주・포항・분당・강남에 이어 일산에 초대형 불교종합병원을 준공하셨다. 그리고 미국 LA 소재 로얄 한의과대학 및 부속한방병원을 인수함으로써 동국대학교가 서구사회까지 진출해 동양의학을 전파하는 쾌거를 이루셨다.

대종사는 자신과 권속에겐 칼날처럼 엄격한 율사(律師)이셨고, 타인에겐 한없이 자비로운 보살(菩薩)이셨다. 이에 대한불교조계종 전계사(傳戒師)로서 수천 명의 행자교육 수료생들에게 사미계와 사미니계를 수여하셨고, 정토를 구현하는 원력보살로서 수만 명의 재가자들에게 오계와 보살계를 수여하셨다.

꽃이 피면 절로 향기가 퍼지고, 열매가 익으면 나무 아래로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대종사의 법향(法香)과 원력(願力)을 우러르는 발길이 각지에서 쇄도하였고, 대종사의 탁월한 지도력과 공적을 기리는 노래가 만방에서 울려 퍼졌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대종사를 찾아 지난한 국정에 자문을 구하였고, 스리랑카 국립 프리베나대학・일본 대정대학(大正大學)・용곡대학(龍谷大學)・키르기스스탄 국립대학 등이 앞 다투어 대종사께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1995년 10월에 직지사 30년 중창불사를 회향하며 개최한 국제학술세미나에는 연인원 5만여 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하는 성황을 이루었고, 고희(古稀)를 맞은 1997년 4월에는 세계불교학계의 석학들이 52편의 논문을 엮어 《한국불교의 좌표》라는 기념학술논문집을 봉정하였다. 또한 1999년 4월에는 직지사 문도회가 대종사의 학위기(學位記)를 엮어 《오녹원 스님 학연기》를 간행하였고, 2002년 4월에는 학교법인 동국학원에서 대종사의 연설문과 법문을 편찬해 《불교와 교육문화》를 간행하였다.

대종사는 2002년 12월 20일 동국학원 이사장을 사임하고 직지사로 돌아온 이후로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서 종단의 대사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2004년 4월에는 사형이신 관응당(觀應堂) 지안 대종사(智眼大宗師)를 이어서 직지사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후학들의 귀감이 되셨다. 직지사 명적암(明寂庵)에 은거하면서 말년을 보내던 대종사는 노령과 숙환에도 후사에 대해 일절 당부하는 말씀이 없으셨고, 문도들 역시 한 마디의 유훈도 여쭙지 않았다. 왜냐하면 직지사의 기왓장 하나 벽돌 한 장이 곧 스승의 진신이고, 노구에도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일상이 곧 스승의 유훈이며, 세간과 출세간을 종횡무진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했던 발자취가 곧 스승의 비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종사는 오랜 병석에서도 고요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다가 2017년12월23일 에 직지사 명월당에서 입적하셨으니, 세수(世壽)는 90세요, 법납(法臘)은 77세이시다.

사실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고 공적이 있으면 숨기지 않는 것이 남은 자의 도리이다. 이에 간략하게나마 대종사의 행장을 엮어 만대의 모범이 되기를 기원하고, 평생을 함께한 벗을 떠나보내며 어설픈 노래 한가락으로 서글픔을 달랠 따름이다.

 

찬란했던 그림자 거두니 한 물건도 없어라          燦影息了無一物

허공을 비추듯 밝고 맑아 티끌 한 점 없네          瑩若暎虛絕點瑕

이에 함께 걸었던 70년 세월이 생각나              因憶同行七十年

지팡이 짚고 푸른 동산에서 떨어진 꽃을 밟아본다   携笻綠園踏殘花

 

파계사(把溪寺) 조실(祖室) 도원(道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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