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승파송 50주년 기획] 군 포교 발자취

1968년 11월30일 1기 5명
장병 위해 해외 전방 누비며
헌신적 노력 성실성으로 신뢰 

교구 출범 비구니 군승 파송 
자원 확보 후원 강화 등 과제 

2018년은 군승파송 50주년이 되는 해다. 교구는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50년을 내다보는 새로운 군포교 비전을 준비중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30일에 열린 제49주년 군승의 날 기념법회.

2018년은 군승 파송 50주년이 되는 해다. 1968년 11월 5명의 군승이 처음으로 배출돼 우리 군과 함께 했다. 군 포교 역사는 그 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스님들은 목탁을 들고 전쟁터의 군인을 찾았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는 기독교 천주교는 정식 군종장교로 받아들이면서 불교는 배척하는 이해 못 할 정책을 펼쳤다. 

통합종단이 출범 하고 종단은 오랫동안 군승파송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기득권을 지닌 기독교 목사들이 집요하게 반대했다. 정부의 소극적 정책과 기독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단을 중심으로 대학생불자회와 신도들의 요구, 군내 불자 장교들의 도움, 불교신문의 지속적 여론 환기로 마침내 군승 요원이 선발되고 소정의 교육을 거쳐 1968년 11월30일 1기 군승 5명이 배출됐다. 김봉식 장만수 권오현 권기종 이지행 등 5명의 군승이 그 자랑스런 이름이다. 

기독교가 15년간 뿌리 내린 군에 이들은 혈혈단신 처음부터 만들며 채워야했다. 당시 까지 불교는 법회라는 개념 조차 생소했다. 군승들은 처음에 각자 배치된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법회 교안을 만들고 제각각 운영했다. 그러다 2기 3기 가 계속 배출되면서 법회 방식과 내용을 통일했다. 일요법회, 찬불가, 법문 등의 현대화된 법회는 군승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사찰에 확산됐다. 오늘날 일반화된 법회는 초기 군승들의 공이다. 

1969년 6월16일 이인수 법사가 공군 특간 제20기로 임관해 공군 최초의 군승이 됐다. 1970년 7월27일 김정길 법사가 해군 특교대 제51차로 임관해 첫 해군 군승이 됐다. 이로써 육 해 공 군 모두 군승이 파송됐다. 5기생이 배출된 1972년까지 육군 24명, 해군 3명, 공군 5명으로 모두 32명으로 대폭 늘었다. 그 사이 1기 생 5명중 3명이 전역했다. 수가 늘어나면서 배치 부대가 육본 군사령부에서 점차 군단급으로 확장됐다. 

대대까지 파송돼 나가있던 군목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초기 군법사 들은 개척자 정신과 사명감을 갖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 장병들과 지휘관들로부터 깊은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이들은 넓은 지역을 시골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면서 이동식 법회를 열고 불교 신자들을 파악해갔다. 1969년 8월 육군군종센터가 문을 열었다. 첫 군법당이었다. 비록 기독교 천주교 합동 종교센터이지만 최초 법당 의미는 컸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군 포교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군승은 육해공군 삼군 모두 배치됐다. 외형은 모두 갖춘 셈이 됐다. 군법당 만 해도 71년 까지 벌써 10개의 군법당이 건립됐고 4개가 건립 중에 있을 정도로 군 포교는 빠르게 성장했다. 육군중앙불교장교회 창립을 필두로 각 군 지회 별로 잇따라 건립돼 군내 불자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총무원도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군승이 늘어나면서 이를 총괄할 군승단 조직이 생기는 등 1970년대는 군 포교 초석을 하나씩 다져갔다. 

1970년대 뒤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군승들의 헌신적 노력과 불자장교회를 중심으로 한 군불자들 종단의 관심 신자들의 적극적 후원 속에 급성장했던 군불교는 1980년대 초입에 뼈아픈 순간을 맞는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전대미문의 불교 탄압 책동에 일부 군승들이 연루됐다. 1970년대가 군법당 건립, 군신자수 증가 등 하드웨어 구축에 주력하는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어린이 법회 활성화, 군법사 해외연수 등 그동안 소홀히 했던 포교 분야에 집중하면서 실질적인 내용을 채우는 시대였다. 해 공군 법사들도 늘어나면서 육군 위주 운영이 점차 다양화됐다. 

10·27 법난으로 종단 지도부를 강제 퇴임시키고 비상종단을 만든 군부에 의해 군법사 결혼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긴 종헌이 개정됐다. 1984년 12월 최초의 순직 법사가 나왔다. 백두산 부대 군법사로 부임했던 이동신 법사가 부임 4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방문해야 할 장병들은 많은데 교통수단이나 도로 사정이 열악한 군내 포교 환경이 빚어낸 안타까운 사고였다. 

1980년대는 정착기를 넘어 확장기라 불릴 수 있다. 군법당 설립, 각군 부대 군승 파송 등 기본 유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어린이 법회, 유치원 운영 등이 대표적이다. 군승교육이나 운영도 체계화 됐다. 군법사 개인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점차 조직화 통일화를 꾀했다. 법복을 통일하고, 군승단 운영을 체계화 하며, 교육을 일원화했다. 

군승파송 20여년이 되면서 군승들의 직위도 올라가고 군종장교 안에서 위상도 높아졌다. 역사를 정리할 정도로 역량도 커졌다. 육군의 김덕수 법사가 새로운 역사를 썼다. 1985년 군승제도 창설 17년 만에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 김덕수법사는 2년 뒤 군종실장, 4년 뒤 군종감에 취임했다. 1986년 8월21일 예비역 군법사 31명이 모여 예비역군법사회를 창립했다. 1986년 11월30일 군승의 날을 맞아 불교군종사가 편찬됐다. 

1968년 11월30일 군승 1기생 5명이 임관 후 위문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994년 종단 개혁은 군 포교와 군승단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종단 개혁은 전근대적인 종단 체계를 정비하고 각 분야에 대한 종단 책임을 강화하는 혁신이었다. 또한 정부와 대등한 관계를 설정하는 불교자주화 운동이기도 했다. 자주적인 면모를 갖춘 종단은 정부와 협상을 통해 불교계에 불리한 군 관련 제도를 바로잡았다. 동국대 불교대학 뿐만 아니라 4년제 졸업자 자격을 갖춘 모든 스님들이 군종장교로 임관할 수 있게 됐으며 군승 수가 군내 신자 비율에 따라 대폭 늘어났다. 군종장교 연령 상한, 2003년 10월 월남전 이후 최초 해외 파병 등도 종단이 일군 성과다. 

종단은 군승단의 종단 정체성 강화와 결속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군승 파송 후 30여년 간 종단은 내부 문제에 골몰하느라 군 포교는 군승들에게 거의 일임하고 방치하다시피 했다. 군승단 자율은 긍정적 면도 있지만 일부 군승들에 의한 전횡도 나타났다. 이로인해 일선에서 노력하는 군승들이 진급 문제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등 폐단이 생겼다. 

종단은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종단 주도의 군 포교 정책을 수립했다. 일부 군승의 저항이 있었지만 2003년 군불교위원회를 거쳐 2005년 군종특별교구가 출범했다. 군법당에는 종정예하의 교시가 걸렸다. 이어서 2009년 군승 결혼을 허용하던 종헌도 개정함으로써 군승들은 조계종 소속 승려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이로인해 치러야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결혼 불허로 인해 군승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동국대 출신의 우수한 인력이 군종장교를 기피함으로써 군승 수급과 우수 자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교구화 이후 종단 차원의 체계적인 군포교 지원, 군승 선거권 등 권리 보장책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종교구 출범 후 초대 일면스님, 2대 자광스님, 3대 정우스님에 이어 4대 선묵스님에 이르기까지 군포교가 체계적으로 정비되고 종단과 신뢰가 강화됐다. 스님 불자들의 지원도 늘어났다. 군법당 불사가 군승 개인의 노력에서 군종교구 지원으로 바뀌면서 군승들이 장병 상담 등 본연의 업무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여성 군인이 많아지면서 여성 성직자의 군 진출도 이뤄졌다. 2000년 민간인 성직자 제도를 통해 비구니스님들이 영외 법당에서 군승을 대신해 장병 상담, 군법당 운영 등을 맡다가 2014년 최초의 비구니 군승이 탄생했다. 명법스님이 첫 문을 연데 이어 이듬해 균재스님이 임관했다. 

2016년 첫 해군 비구니 군승에 혜능스님이, 2017년 공군 첫 비구니 군승 자원스님이 임관해 50여년 전 군승 새 역사를 열었듯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비구니 군승들은 자원도 우수한데다 열성적으로 일해 군 장병들의 반응과 군내 평이 좋다. 군과 종단 안팎에서는 비구니 군승을 더 많이 늘여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군승파송 50년 역사는 종단과 군승이 함께 일궈온 자랑스런 역사다. 후발 주자의 어려움을 성실과 헌신으로 극복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강군 육성과 정예화에 일조했다. 종단은 정부와 협상을 통해 제도를 통해 불자들은 후원으로 지원했다. 군종교구 출범으로 종단과 군의 유대는 더 강화됐으며 책임도 커졌다. 

앞으로 50년도 종단과 군승이 일체화돼 군 장병들의 심리적 안정과 정예 군대 육성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줄어드는 군승지원자와 그로인한 질적 하락, 종교의 사회영향력 감소 등 내외부의 과제가 적지 않다. 군종교구가 중심을 잡는 가운데 우수 인력확보와 후원 확대를 위한 문호 개방 등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한다. 조계종 군 포교를 넘어 부처님 가르침 전파를 통한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 대한민국 국군의 정예화와 안녕을 위한 새로운 호국불교상을 정립할 때다. 

[불교신문3359호/2018년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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