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 불교’ 아스팔트 위에서 시민과 만나다

 

독실한 불자 스님들이 나서 추모 
부친 해인대 다니고 사찰서 공부
朴열사 계명암서 조석예불 올려

49재 처음으로 국민의례 등장
스님들 49재 통해 민주화 주도
도승스님 31년 째 해마다 추모재 
조계사 추모재 16년 뒤 공식 봉행 

사리암 49재. 사진제공=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영화 ‘1987’이 화제다. 서울대 2학년 박종철 군이 수배중인 선배 행적을 대라는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 1987년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31년 전의 아픈 기억을 담은 영화다. 

1987년과 박종철은 불교계에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부모와 박종철 열사가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불교는 고인을 추모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고 정국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박종철 열사 위패를 모신 부산 사리암은 온 국민들 시선이 모이는 가장 뜨거운 곳이었다.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는 부산 사리암 신도였다. 부처님오신날에만 절에 가거나 부모 따라 절에 가는 ‘샤이 불자’가 아니라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고 수행도 한 불자였다. 박종철 열사 조부모도 독실한 불자로, 박정기 씨는 한국전쟁 후 해인사 내에 있던 해인대학(1960년대 말 운영권이 넘어가 마산대학을 거쳐 현재 경남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공부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고 범어사 계명암 등에서 생활했다. 그는 아들이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후 충격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버텼다. 박종철 열사 역시 독실한 불자였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범어사 계명암에서 조석 예불을 올릴 정도로 신심이 돈독했다. 부산 괴정 동주대학 옆의 사리암이 박종철 열사 가족이 다니는 절이었다. 사리암은 시내에 있어 전국의 고승이 부산에 오면 머물던 곳이었다. 당시 사리암 주지는 도승스님이었다. 도승스님과 사리암이 정보기관의 갖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박 열사와 가족을 위해 재를 지내면서 불교는 민감한 시국의 한 복판에 발을 딛게 됐다. 

1987년 1월13일 박종철은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수배중인 박종운 소재를 캐려는 경찰로부터 물고문을 받았다. 1월14일, 목이 욕조에 눌려 질식사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경찰은 유가족 몰래 벽제 화장장에서 화장하고 변사처리하려 했다. 중앙일보가 이 사실을 검찰로부터 알아내 1월15일 2단기사로 첫 보도하여 세상에 폭로했다. 부검을 마친 박종철 열사 시신은 화장해 1월16일 임진강에 뿌려졌다. 도승스님은 재가 흩어진 모래를 경전과 함께 묻고 묘비를 세웠다. 부친은 아들의 재를 강에 뿌리며 “종철아 잘 가거래이, 애비는 할 말이 없대이…”라며 울부짖었다. 장례를 마친 가족은 17일 사리암에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이 때부터 사리암과 불교가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49재가 구심점이 됐다. 최근 영화 <신과함께>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49재는 망자의 영혼 즉 영가가 새로운 곳에 태어나도록 일주일마다 한번 씩 법회를 여는, 불교장례법이다. 매 1주일 마다 7일간 영가를 잊지 않고 추모하는 49재는 불교는 물론 대학생 재야 등 민주세력이 집결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특히 종교의식이기 때문에 정부가 강제로 막을 명분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불교가 시국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정부에서 볼 때는 반대로 49재는 눈엣가시였다. 삼우제를 끝내고 박종철 죽음이 잊혀져야하는데 적어도 49일간 끌려가게 됐으니 정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종단 중앙은 당시 정부의 입김이 미칠 때이니 걱정 없지만 해당 사찰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사리암으로 전해졌다. 다들 피하는 바람에 부친마저 포기하려 했던 추모재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부담감은 엄청났다. 도승스님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불교가 시대 정신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하고 싶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좋은 길로 가기를 빌어주고 세월이 지나도 기억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불교가 거리에서 시민과 만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7년 3월3일 조계사 앞에서 열린 추모재. 사진제공=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1월20일 초재(初齋)가 사리암에서 열렸다. 경찰은 사리암 초재만 허락했다. 부산의 정치인과 재야단체 학생들이 사리암으로 향하던 행진은 경찰에 의해 막혔다. 해인사 주지를 지낸 명진스님의 집전 아래 통도사 청하스님이 영가 천도 법문을 했다. 부친과 어머니 정차순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다. 2월7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당시 명동성당과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의 상징이며 대부였다. 불교계는 이름조차 내밀 수 없었다. 명동성당은 그 후 6·10 민주항쟁의 중심이었고 박종철 고문은폐 조작을 폭로한 단체도 진보적인 신부들이었다. 그런데 박종철 고문사건은 종교 문제로 인해 불교계가 주도하고 있었다. 추도식 날 사리암에서는 추도 타종을 했다. 어머니와 누나가 울부짖으며 타종하는 사진이 국민들을 다시 울렸다.

3월3일 49재를 앞두고 정국은 긴장이 극에 달했다. 야당 재야단체 학생들은 49재가 열리는 3월3일을 ‘고문추방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날로 정하고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전국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불교계 진보인사들도 각 종교, 사회단체 정치권과 연대하여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준비위원회에 지선스님, 진관스님, 당시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고광진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서울 조계사와 부산 사리암, 광주 원각사 등 전국 주요 도시 사찰에서는 49재를 봉행할 계획이었다. 

조계사 49재는 원래 조계종 총무원 주최로 열기로 했지만 부산 사리암으로 변경됐다. 조계사 법회는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됐다. 대신 조계사 앞 대로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그 마저도 경찰이 막아 몸싸움이 벌어졌다. 박종철 열사가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사실에 ‘평범했던’ 불자들도 49재 준비에 적극 나서고 독재정권을 규탄했다. 당시 서울불교청년회 회장으로 49재 법회를 준비했던 배영진 전 대불청 회장은 몇 해 전 불교신문 기고에서 “박종철 군이 불자인 점을 고려해 규탄법회를 열기로 마음먹고 은밀한 준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전두환 정권은 49재 추모법회 마저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경찰을 배치해 원천봉쇄작전에 나섰다. 그 결과 부산 사리암에서의 49재를 제외하고는 당초 계획했던 49재 및 평화대행진이 모두 무산됐다. 경찰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와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을 향해 사과탄을 던지며 시민들을 강제 해산했다. 전국적으로 439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28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돼 16명은 구속 기소됐다. 그 중에는 진관스님도 있었다. 사리암에서 열린 총무원 주최 49재는 부모님과 신도 서울에서 내려온 총무원 간부와 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3시간 동안 진행됐다. 

박종철 열사 추모재를 진행하면서 불교는 사회와 민주단체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게 됐다. 특히 49재가 개인이나 한 가문의 제례를 넘어 시위문화 혹은 사회 통합의 기능을 하는 가능성까지 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49재는 불교신자들에게도 낯선 장례의식이었다. 서동석 전민불련 의장은 <불교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사회운동 최초로 불교식 천도의식인 ‘49재’가 국민적 의례로 치러졌다”며 “조계사 앞 대로에서 약식으로 치러진 49재는 참여한 대중과 경찰의 치열한 몸싸움으로 ‘민중’ 불교 의례가 되었다. 49재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광주, 부천 등 전국적으로 봉행되었으며, 범국민추도위는 이 날을 맞아 ‘범국민 민주화 평화대행진’을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하여 그야말로 49재가 불교의례를 넘어 민중의례로 치러졌다. 불교계의 결집된 단결력은 1987년 들어 정권의 반민주적 반불교적 폭압통치에 대항하는 전국적 공동투쟁 조직으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했다. 영화 ‘1987’에서는 그러나 불교와 사찰의 역할, 49재 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박 열사의 누나 박은숙 씨도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이 점이 아쉽다고 밝혔다.

지난해 양산 성전암의 30주기 추모재.

이처럼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인을 천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며 국민들과 함께 나섰던 불교계는 이후 사회민주화 평화통일 등에 적극 나서고 다른 시민사회단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1970년대부터 진보 운동에 눈을 떴지만 불교계 진보운동은 불교계 내부 현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10·27법난, 불교재산관리법 등 불교와 정부가 관련된 현안을 매개로 내부 투쟁에 집중했다. 물론 1986년 9·7해인사 승려대회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농업개방 등 사회문제를 거론했지만 주요 요구사항은 아니었던데다 시위 장소가 사찰이었다. 박종철 열사 49재를 치르면서 불교는 시민들이 있는 거리로 나섰고, 스님과 일반 불자들이 그 대열에 함께 했다. 

불교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박종철을 기렸다. 사리암에서 해마다 1월13일 치르던 추모재는 도승스님이 통도사 앞 성전암으로 옮긴 뒤에도 빠지지 않고 봉행한다. 진관스님은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해 우리 사회의 인권 옹호를 위해 헌신한 개인과 단체를 표창했다. 스님들이 나서 추모비 건립을 위한 선서화전을 열기도 했다. 2003년 조계사 주지 지홍스님(현 포교원장)은 1987년 3월3일 경찰의 방해로 무산됐던 박종철 열사 추모재를 봉행했다. 16년 만에 조계사가 박종철 열사를 맞이한 것이다. 2007년에는 박종철 열사를 비롯,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영령들을 기리는 추모재가 조계사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무엇보다 열사가 만들고자 했던 민주 평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종단과 스님들은 잊지 않는다. 1987년과 박종철 열사는 산중에 머물던 불교를 국민들 곁으로 데려간 특별한 인연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불교신문3362호/2018년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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