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용성은 옌볜 대각교당이 
자리를 잡자 
경성으로 올라와 
‘만일활구참선결사회’를 기화로 
‘대각교 의식집’을 만들었다. 
선불교 전통을 지키려고 
불교라고도 할 수 없는 
반승반속의 기존종단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경남 함양 
백운산으로 갔다. 
30정보의 토지를 확보하고 
‘화과원’을 설립했다. 
감나무, 밤나무, 복숭아나무 
감자, 고구마, 상추, 배추를 
직접 심고 가꿨다. 

이것이 활구참선이요
반농반선이자 자급자족이다. 
중이 자식새끼 줄줄이 낳아 
앞세우고 다니면서 
‘금멕기’ 벗겨진 나무불상 앞에서 
아무리 목탁을 두드려대 본들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은엽은 홍범도로부터 삼촌이 훈춘 징신진 초가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떠났다. 용성이 태현을 딸려 보내려했지만 완곡히 사양했다. 옌볜 대각교당에서 두만강이 내려다보이는 투먼(圖們)을 거쳐 물어물어 훈춘 징신진 퀀허촌(圈河村)으로 갔다. 두만강 위쪽 드넓은 들녘, 봄물에 방게 기어 나오듯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이 이곳으로 올라와 구름 모이듯 모여 땅을 일구고 낯선 생활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옥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는데, 은엽은 길갓집으로 들어가 전에 안중근 의사가 머문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얼굴에 주름이 파이고 머리털이 희끗희끗 흐트러진 아낙이 대문을 나와, 그리 멀지않은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초가집을 가리켰다.

“저기 저 집이에요. 그 때는 안중근 청년이 누군 줄 아무도 몰랐소. 아마 저 집에서 몇 달 머물렀을 거요.”

아낙이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면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초가집으로 안내해줬다. 집은 초라했고, 빙 둘러 말뚝을 박아 기다란 나무들로 얼키설키 울타리라고 가려놓은 안마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안중근 청년만 거처했습니까?”

“아니에요, 안중근 청년이 떠나고 내내 비어있었는데, 그 뒤 건장한 청년들이 나이가 들어 뵌, 총상을 입은 어떤 분을 모시고 와 간호를 열심히 하더니 그만 돌아가셨어요.”

홍범도 이야기가 맞구나.

“그 뒤로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왜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보인 분들이 가끔 들러 산소와 집을 둘러보고 가곤 했지요.”

“그래요?”

삼촌 묘소에 홍범도 말고 다른 사람들도 찾아온듯했다.

“여기서 돌아가신 그분 산소는 어디 있는지 모르십니까?”

“저 위로 한식경 올라가야 있어요. 돌아가실 때 함께 온 청년들이 마을 사람들과 묘를 썼는데, 훌륭하신 분이라고 그러더랍니다. 당시 같이 온 청년 같은 분들이 수시로 들러 묘지를 손질하고 벌초도 깔끔하게 하데요.”

삼촌이 운명했다는 스산하고 쓸쓸한 초가집 안방, 눈을 감으니 “참 미안하다” 언젠가 거실에서 속마음을 털어놓던 삼촌 얼굴이 떠올랐다. 뭐가 미안해요, 삼촌? 내가 너무 소홀했어…. 은엽은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삼촌은 내가 시집을 가 안온한 생활을 하기 바랐는지 몰랐다. 항상 말 없이 눈에 보이지 않은 배려로 보살펴준 삼촌의 얼굴이 떠오르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돌아가신 분이 아버님이신가 보다.”

아낙이 혼자소리로 때 묻은 손수건을 꺼내 손에 쥐어주면서 등을 쓸어주었다. 은엽은 눈물을 삼키려고 얼른 마음속으로 ‘신묘장구 대다라니’ 하다가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을 입술 비틀며 되뇌었다. 그래, 한 번 지나가버린 일은 다시 재현해낼 수 없다. 얼른 마음을 비워 한곳에 모으고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아주머니 산소까지 안내 좀 해주시겠습니까?”

은엽이 눈물을 보여서 그런지 대답이 착잡했다.

“아이고, 모셔다드리고 말고요.”

아낙의 안내를 받아 삼촌 묘소로 향했다. 이상하게 걷는 발걸음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공중에 둥둥 떠서 가는 것 같았다. 초가집 안방에서 애간장을 도려내 버렸는가. 무엇을 모두 빠뜨린, 도무지 내력을 알 수 없는 불가측성의 미스터리가 가슴을 허전하게 했다. 화생(化生) 같은 그 무엇이 씌워댄 건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삼촌 묘지에 이르면 절규를 할 것 같은 예감이 어디론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은엽은 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한 연고냐, 지나간 마음은 다시 재생해낼 수 없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느냐, 현재는 재깍재깍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가고 있다. 재깍 가고 있는 지금이 다음 재깍으로 옮겨지면, 방금 재깍했던 현재는 벌써 과거가 된다. 은엽은 칼날 같이 시간의 이어짐에 소름이 끼쳤다. 시간이 면도날보다 더 예리하고 참혹했다. 

끔찍해라! 

재깍과 재깍의 사이는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서릿발보다 더 차갑고 냉혹하게 끊겨 있었다. 현재는 어디 있는가? 없었다. 현재가 발붙일 곳이 없는데, 미래를 어디서 찾겠는가. 굳이 답을 내놓자면 지금 재깍거리는 현재가 곧 미래였다.

은엽은 눈을 감았다. 산 위에 노란 달이 떠올랐다. 떠오르는 달이 점점 커지면서 하늘을 꽉 채웠다. 은엽은 달 속에 갇혀버렸다. 모든 것이 금색이었다. 앗!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삼촌의 산소에는 산뜻한 잔디가 새로 돋고 있었고, 산소로 안내해준 아낙도 투명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허허! 삼촌은 돌아가셨으나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용성은 옌볜에 대각교당을 세우면서 70여 정보의 토지를 구입했다. 대선사가 저 많은 토지를 어디에 쓰려고 저러는가.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나가서도 새듯 더러 생배앓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반은 문자 쓴다고 한다. 그러면 들은풍월이라도 문자로 따져보자. 욕망, 욕구, 요구, 이 세 마디는 비슷한 소리처럼 들린다. 그래도 꼬투리를 잡아 꼬치꼬치 따져보면 가닥이 나온다. 그러니까 욕망은 무엇을 누리고 싶어 탐내는 것이고, 욕구는 무엇을 얻고자 바라는 것이고, 요구는 생리 또는 심리적으로 모자람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조항은 선불교의 지향점과 모두 배치된 것으로 치부된다. <금강경>에 빛깔로 부처를 보려하고, 음성으로 부처를 취하려 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말이 있다. 수행자가 찾으려고 한 것이 빛깔의 부처가 아니고, 음성의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면, 좋다, 어깃장을 내어 거기에 환상이란 것을 빗대보자. 환상이 현실에 대해 정확해야할 지각을 헷갈리게 한 것이라 한다면 역으로 환상은 흥겨운 것으로 바뀔 수도 한다. 어차피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객관적으로 올바르고, 방법도 유일하고 소여(所與)가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관 좋은 사찰이 유흥장이 된들 나쁘다할 수 없지 않은가. 궁짝 궁짝 궁따라 궁짝, 동방화촉 노도령도 숙녀를 만나면 헤벌래 웃는 법이거늘, 일본불교가 봇물이 터져 대처가 허용되니, 금기된 여자가 유학승들에게는 환상의 무지개를 탄다. 사찰재산이야 거덜이 나든 말든 오초 흥망을 내가 왜 간여해야 하는가. 이것이 망불(亡佛)이자 망국이다. 

백장청규(百丈淸規) 배경에는 안사(安史)의 난(亂)과 회창파불(會昌破佛)이 있었다. 용성이 옌볜 토지 70여 정보를 구입해 반선반농(半禪半農)을 시행하면서 선농당(禪農堂)을 지은 것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켰기 때문이다. 용성은 옌볜 대각교당이 자리를 잡자 경성으로 올라와 기축년 ‘만일활구참선결사회’를 기화로 ‘대각교 의식집’을 만들었다. 선불교 전통을 지키려고 불교라고도 할 수 없는 반승반속의 기존종단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어찌 보면 삐딱하고 돌연변이 같지만 이게 ‘깡탱이’란 것이다.

이번에는 경남 함양 백운산으로 갔다. 30정보의 토지를 확보하고 화과원(華果院) 설립했다. 감나무, 밤나무, 복숭아나무, 감자, 고구마, 상추, 배추를 직접 심고 가꿨다. 이것이 활구참선이요, 반농반선이자 자급자족이다. 중이 자식새끼 줄줄이 낳아 앞세우고 다니면서 ‘금멕기’ 벗겨진 나무불상 앞에서 아무리 목탁을 두드려대 본들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이쯤 되면 불교가 막다른 길에 도달해 돌아설 수 없게 된다. 용성은 승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선농불교로 사원의 경제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바루를 들고 민가의 대문 앞에 서있어도 숟가락으로 밥을 덜어준 사람이 없다. 그래서였을까 백장선사도 목탁을 들어야할 손에 괭이를 들고 솔선해 나섰다. 노장님이 수고롭게 앞장서 나선다고 대중들이 괭이, 가래를 감추어 버렸다. 선사는 농기구를 찾다가 없으니 그날은 방으로 들어가 앉아 있다가 어김없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정신이 활구참선이요, 선농불교였다.

하루는 용성이 산을 내려갔다가 마을 앞에서 아이들이 자치기놀이 하는 것을 보았다. 눈 푸른 저 어린아이들의 티 없이 밝은 모습이 앞날의 희망으로 보였다. 

곱게 자란 소나무는

그림자가 굽지 않고

비인 골에 메아리는

소리 좇아 대답한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바로 저 아이들이 미래다. 저 아이들에게 큰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 대장부로 길러야 한다. 대장부는 범어로 ‘mah-purua’다. 우리말로 풀면 최고로 인격화된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를 말하는데, 맹자는 ‘하늘과 땅을 거처로 삼고 바른 자리에 서서 대도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은 관직에 나아가면 백성과 함께 같은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로도 그를 흔들 수 없고 빈천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을 대장부라 한다고 말했다. 

[불교신문3362호/2018년1월20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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