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센텀일심사 주지 혜룡스님 강의

지난 16일 서울 한국불교연구원에서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부산 센텀일심사 주지 혜룡스님이 ‘만해 한용운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해 강의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불교미래도 변화할 수 있어”

만해스님이 쓴 <조선불교유신론(이하 유신론)>은 당시 한국불교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불교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노출됐다. 스님 개인의 문제도 있었고, 종단적인 사안도 있었다. 이로 인해 불자가 감소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불교교단 문제에 관심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급격한 변화를 희망하며 항의도 하고 데모를 하기도 한다.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심정은 이해되지만, 그런 방식으로만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수행문화가 존재한다. 다른 사회집단과 문제해결 방식도 다르다. 해방 이후 교단은 정치사회문화적인 문제에 직면했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은 완벽할 수 없었다.

심층적이고 분석적으로 불교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당장 해결하겠다고 뛰어다니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원인을 제대로 알고 해결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전체적인 틀 안에서 한국불교를 바라봐야한다.

이와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개인의 수행이다. 불교교단이나 불교계 걱정하는 불자들을 실제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정작 자기 신행에 소홀하다. 불교 문제를 개선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정작 자기 안에 일어나는 분노, 악업을 정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면에 쌓인 화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교개혁을 얘기한다면 어떨까. 개혁도 잘 안되겠지만, 자신에게 어떤 도움도 안 된다. 좋은 일 한다고 하는데 스스로 악업을 쌓는 것일 수도 있다. 불교개혁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도 자신의 신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불교신행은 세 가지 요건을 갖는다. 첫 번째는 내 개인의 문제다. 현실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부터 신행하고 아프면 몸도 추스르는 등 내 자신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기복신앙도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는 ‘타’의 문제다. 다른 사람으로도 표현되지만, 내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을 말한다. 불자라면 내가 다니는 절, 교단이 타에 해당한다. 세간의 문제를 잘 풀어냈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노병사(老病死)는 해결이 안 된다. 우리 삶에서 수행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세 가지 요건은 서로 모순될 때가 있다. 나 자신을 위한 것과 다른 사람이나 조직을 위한 일이 충돌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세간과 출세간 문제도 부딪힐 수 있다. 직장을 다녀야 하는 현실과 수행에 전념해야 하는 당위성이 이런 경우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수행해도 타인에게 무관심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에 소홀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균형을 맞춰야 한다.

지금 여기 다시 ‘유신론’

우리가 <유신론>을 공부하면서 고민하는 문제는 자타의 균형이다. 교단이나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는데, 가끔씩 출세간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유신론> 공부를 해나갈 때도 상치될 수 있는 문제에 어떻게 균형을 잡아나갈 것인지 평상시에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신론>을 다시 펼쳐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불교교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유신론>을 읽는 것은 불교에 내재된 복합적인 문제들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이다.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신행문제를 간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회적 문제와 개혁을 고민할 때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도 스스로 수행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만해스님은 출가해서 4~5년 사이에 <유신론>을 썼다. 스님의 지적수준은 높았지만, 당시 불교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쓴 대목도 있다. 이후 스님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불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간파하고 일본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글을 계속 썼다. 그 글과 <유신론>을 연결해야 오늘날 한국불교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유신론>만 보면 당시 스님의 한정된 시각만을 알게 되고, 현대불교 전반을 이해하는데 착오가 생긴다.

한국불교는 1700년 역사를 갖고 있지만 세 가지 위기로 오늘의 상황을 맞았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첫 번째 위기였다. 그 다음 일제강점기 사찰령이고,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을 기독교화 하려 했던 시도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세 문제가 한국불교를 규정짓는 중요한 틀이다. 특히 억불정책과 사찰령은 <유신론>에도 지속적으로 언급돼 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사찰은 폐사됐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왕실과 사대부는 불교 내부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조선왕실이 정권을 세운 뒤 불교 재산을 몰수해서 공신과 대중들에게 인심을 쓰려고 한 의도가 숨어있다. 이는 현대에 와서 전두환 정권의 10.27법난으로 재현됐다. 왕실에 의해 불교교단은 선교양종으로 통합됐다. 절마다 예불도 다르고 다른 종단 가면 예불 내용도 다르다. 종단이 다르다는 것은 다른 체계로 신봉하는 모임이다. 법화경으로 예불하는 종단이 있고 화엄경으로 예불하는 종단이 있다. 이를 막무가내로 합치면 어떻게 될까.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스님들이 사상적인 논의를 거쳐 합친다고 해도 혼란이 있는데, 강제적으로 합쳐버리니까 질서도 사라졌다. 도첩발급이 중지되고, 도승제가 없어지면서 출가할 길이 막혔다. 스님들의 도성출입 금지가 이어져 불교는 산중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왕비와 궁녀들을 중심으로 불교신앙은 이어졌을지언정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불교는 자연히 쇠퇴했다.

사찰령으로 위기 맞은 불교

이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를 맞았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제정해 한국불교를 통제했다. 주지 임명을 해도 총독이 승인을 해야 하고, 사찰 소유 동산을 이동하려 해도 총독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사찰 내부의 일은 스님들이 대중공사를 통해 결정해온 전통을 철저히 부정당했다. 명망이 있든지 없든지 총독이 임명하면 그 스님이 전권을 가지게 된다. 공부했거나 계율을 지켰거나 상관없었다. 그러다보니 총독부 입맛에 맞는 스님들이 자연스럽게 중심에 서게 됐다.

대처를 인정하는 일본불교는 한국불교에는 또 다른 위기였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 독신 출가 수행자들이 중심이다. 스님들이 결혼해서 생활한다는 것은 곧 파계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일본불교는 다르다. 고려시대 말인 14세기 일본불교의 주류는 정토종과 정토진종이다. 정토종은 누구라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게 중심이 아니다보니 출재가에 대한 구분이 모호했다. 정토종이 성행하면서 일본불교는 비승비속으로 흘러갔다. 메이지유신 직전에 가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출가한 스님의 결혼 여부는 각자에게 맡긴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두 나라 불교는 전혀 다른 역사와 토대를 갖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일본불교 분위기를 따르는 스님들이 생겨났다. <유신론>의 가장 큰 문제로 평가되고 있는, 스님들도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이 나오기에 이른다. 임의로 결혼하는 스님들이 생기면서 종단은 혼란에 빠졌다. 결혼하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자연히 사찰의 재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독신 출가자와 대처승간 괴리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처럼 대처와 사찰령은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님들은 교단을 만들자고 했다. 조선시대 훼불정책 이어지면서 불교는 구심점을 잃었다. 한국불교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마음으로 스님들이 조직을 구성하려고 하니 총독부가 강하게 막았다. 결국은 1939년에 이르러 태고사(조계사 전신)가 세워질 때 총독부가 종단을 인가했다. 중일전쟁에 전쟁물자 동원하려다 보니까 개별 사찰로 접촉하기 어려워 종단을 통해 착취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이런 탄생배경 때문에 한국불교는 일본정부와 협력하는 한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광복 후 불교는 힘을 쓸 수 없었다.

미군정, 이승만 정권에 소외

미군정이 들어오고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면서 불교는 소외됐다. 해방 전 한국 기독교 인구는 0.5%에 불과했다. 미군정 당시 정부 요직 반 이상이 기독교 신자였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을 개신교화 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핍박의 대상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용적인 면에서 타격과 혼란을 받아왔던 게 우리 불교 역사다.

한국불교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한국불교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어왔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한국불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 일탈을 제외한 종단의 문제는 이런 역사를 근간으로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종권을 잡고 있는 스님이건 안 잡고 있는 스님이건, 재가자이건 고민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내재하고 온 우리 불교를 개선하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되는지 풀어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국불교 미래가 나아진다. 이런 역사를 외면하고 문제제기를 하다보면 오랜 시간 혼란이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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