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하도록 도움주는 기업 되겠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회장이기도 한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을 지난 12월20일 양재동 사옥에서 만났다.

제주서 불심 깊은 가정서 자라
어린 시절에도 향냄새 좋아해

국내 아웃도어시장 선두주자
미국 유럽진출 세계시장 주도

고액기부자 ‘아너 소사이어티’
회장 내외 가입 사회공헌 열중

한 때 뉴스에서 한국인 관광패션이 화제가 된 바가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유적을 가도 한국인들은 등산복을 입고 있어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등산복은 여행뿐만 아니라 출근복으로까지 각광 받고 있다. 토종브랜드로 아웃도어 시장을 이끌고 있는 블랙야크도 마찬가지다. 블랙야크는 국내 등산 장비업체로 시작해 이제는 미국과 유럽까지 진출해 한국산 아웃도어 용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을 지난 12월20일 양재동 사옥에서 만났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불교계 대표 사회공헌사업인 행복바라미사업을 후원하는 독실한 불자다.

강태선(74)회장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할머니, 어머니 모두 불자라 어릴 땐 할머니를 따라 암자에 다녔다고 한다. 할머니가 기도하는 사이, 절 마당에서 친구들과 뛰놀며 시간을 보냈다. 그 때도 향냄새를 좋아했다. 지금도 향을 좋아한다. 히말라야 원정에서도 향을 피우고 무사등반을 기원하며 늘 기도한다. 만년설산 히말라야에서 부처님은 그에게 돌아올 곳을 일러주는 나침반과 같다.

“베이스캠프에 가면 먼저 하는 일이 불단을 세우고 지역 스님을 모시고 불공을 올리는 것이다. 산행 끝날 때까지 대원 모두가 무사하길 기원한다. 고산에서 자라는 향나무를 태운다. 의식처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향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향불 먼저 본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고 일기예보를 들은 뒤 세수하고 공양하는 게 일과다.”

강 회장은 평생을 ‘산과 함께’ 살았다. 한라산이 전부였던 제주를 떠나 서울로 온 이유도 북한산, 관악산에 오르고 싶어서였다. 20대 때 서울에 온 그는 산을 오르며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등정에 성공하듯 삶의 고비를 딛고 일어섰다.

“이모 댁 일을 거들며 틈틈이 산에 다녔다. 등산가방 하나 메고 다녔는데 그 가방이 불편했다. 당시만 해도 등산장비는 모두 군에서 불하 받은 것이었다. 미군장비를 불하해 민간에 나오면 수선해서 파는 물건이다 보니 한국인 체형에 안 맞았다. 내 몸에 맞게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가방을 뜯어 고쳤다. 동대문이나 남대문에서 수선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은 아주머니에게 바느질을 맡겼다. 산에 오르면서 가방 좋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주문을 받아 몇 개 팔기도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모에게 10만원을 투자받아 가방 40개를 제작했다. 가방은 금방 팔았지만 수금이 안됐다. 첫 좌절을 맛봤다. 제주도로 돌아가면 이모에게 빌린 10만원을 갚을 길이 없어, 서울에 남았다. 한 달 월급이 5000~6000원인 시절, 언제 10만원을 갚을지 막막했다. 이번엔 이모부를 설득했다. 이모 몰래 40만원을 투자받아 배낭을 만들었다. 국산장비 1호인 배낭은 이렇게 탄생했다. 사업이 잘 되면서 버너, 코펠 같은 장비로 반경을 넓혀갔다.

호황이 찾아왔다. 1977년 고상돈 대장이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하면서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퍼레이드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젊은이들은 환호했고, 대학마다 산악부가 만들어졌다. 등산 붐이 일면서 장비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그러나 1979년 10.26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계엄령 선포로 경기는 얼어붙었다. 아웃도어 시장이 형성도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통행금지도 사라졌다. 야간산행 바람이 불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엔 설악산에 가려면 1박2일이 걸렸다. 그 때만 해도 토요일에 출근해야 해서 1박2일 산행은 엄두도 못 냈다. 통금이 사라지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산사나이였던 강 회장도 밤에 산에 오르고 새벽에 내려와서 가게 문을 열었다. 인수봉 밑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통행금지가 없으니까 멀리 갈 수 있다 싶어 야간산행을 기획했다.

거봉산악회를 만들고, 당시 대학3학년 엄홍길 대장을 앞세워 젊은이들과 산에 올랐다. 첫 야간산행지는 월출산이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스커트 입고 구두 신고 온 여성들도 많았다. 매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밤 10시쯤 출발했다. 새벽5시에 도착해서 라면 끓여먹고 산을 올라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야간산행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 때는 찌그러진 코펠도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였다. 산에 가서 삼겹살 구워서 소주 한 잔 마시고 침낭에서 잠을 청하는 걸 낙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1992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취사 및 야영을 금지했다. 취사 야영이 금지되니, 장비를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강 회장은 히말라야로 갔다.

“히말라야 등반하는 이들에게 기술 장비지원을 많이 했다. 원정 준비하는 사람도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비너, 후렌드 같이 개인장비를 살 돈이 없으니까 아르바이트하면서 슬쩍슬쩍 가져갔는데 그걸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무슨 장비가 그렇게 필요한가 싶은 생각도 들고 직접 가서 보자는 마음으로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히말라야에 미쳤다. 15년 동안 매년 히말라야를 올랐다.

“첫해 히말라야에서 여섯 번째 높은 8201m 초오유에 도전했다. 고산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때 알았다. 차로 해발 3800m 니알람까지 올라가 산장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는데 헛디뎠다. 어지럽고 으슬으슬 추워서 과로한 줄 알았더니 고산병이었다. 사정을 얘기하면 내려가야 할 것 같아서 대원들한테 말을 안했다. 베이스캠프까지 오르니 머리가 아프고 죽겠더라. 하룻밤 자고 동트기 전에 한 대원이 찾아왔다. 대원 하나가 죽어간다는 것이다. 겁이 덜컥 나서 내가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쫓아가보니 고산병 증세가 심했다. 사람 죽겠구나 싶던 차에 마침 일본 원정대가 타고 온 트럭이 있었다. 7시간을 달려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살려 놓은 대원은 죽어도 좋으니 등반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할 수 없이 같이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떠나고 포터 한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진베이스캠프(ABC)까지 1박2일 거리라고 얘길 들었는데, 포터가 1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이튿날 새벽 셋이 길을 나섰다.

“15시간을 걸었는데도 ABC가 안 보였다. 해는 지지 포터는 먼저 올라갔지. 겁이 났다. 포터가 간 방향만 떠올리며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어느 순간 저 앞에 불빛이 보였다. 포터가 먼저 올라가 텐트를 찾고 불을 켠 것이다. 안도감도 들고 화도 났다. 결국 16시간 이상 산행을 해서 ABC에 도착했다.”

그 고생을 해 내려올 땐 다신 안온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1년이 지나면 다시 보따리를 챙기게 된다고 한다. ‘블랙야크’라는 브랜드 이름도 히말라야에서 만들었다.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조난을 당했다. 엄홍길, 민병태 대원은 바로 내려오고 전 다른 하산 길을 택했는데 몇 시간을 걸었는지 비몽사몽했다. 그 때 웬 동물이 후다닥 지나가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동물이 살면 사람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따라 내려왔다. 그 때 만난 게 야크였다.” 생명의 은인 같은 야크가 브랜드명이 돼서 회사는 또 한 번 도약했다.

히말라야에서 경험은 스님들을 위한 신발 ‘자이온’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베이스캠프에 불단을 만들 때 스님을 항상 초청한다. 구멍난 신발을 신고 눈길을 걸어 온 스님들이 도착하면 언 발을 발을 비벼서 녹이는 게 일이다. 그걸 보면서 양말을 드리기도 하고, 여유 있는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다 강 회장은 스님에게 어떤 신발이 필요한가를 고민해 봤다. 스님들 산에서 생활하니까 미끄럽지 않아야 하고 눈이 많이 오니까 방수가 되고 춥지 않아야 한다. 전각을 옮겨 다니면서 불편함이 없게 벗고 신기 편한 디자인을 고민하다가 개발한 것이다. “고어텍스를 써 방수가 100%고, 등산화창을 사용해 미끄러지지 않는다. 보온이 돼 따뜻하다. 양쪽 고무테이핑을 넣어서 신으면서 늘었다가 줄었다 한다. 이왕이면 승복과 색상을 맞춰서 회색으로 만들었다. 겨울에 진가를 발휘하는 신발이라서, 추운 겨울 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제 블랙야크는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하고 있다. 유럽을 넘어 뉴욕 대표 스포츠 용품 매장인 ‘파라곤 스포츠(Paragon Sports)’에 입점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강 회장은 나눔도 실천한다. 지난해 강 회장 내외는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나란히 가입했다. 사회복지법인 블랙야크강태선나눔재단을 통해 중국 네이멍구 쿠부치 사막의 생태원 조성 활동과 네팔 대지진 피해지역 교육 지원이 대표적이다. 중앙신도회가 진행하는 사회공헌사업 행복바라미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강 회장은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면 재투자, 직원복지, 사회 환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누구나 행복할 수 있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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