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사 무문관 타파한 선지식

일본 유학하며 독립운동
인과법 느끼고 백련암 출가
당대의 선풍 드날리고
부산서 홀연히 종적 감춰

천축사 무문관이 1965년 개설돼 1979년까지 정진을 계속하는 동안 100여명이 정진했다. 하지만 6년이라는 결사기간을 원만하게 회향한 수행자는 단 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 명은 우리시대의 대강백이었던 관응스님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무문관의 전설’로 불리는 제선스님이었다.

제선스님은 1940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포산스님에 출가했다. 같은 날에 출가한 정영스님과 출가도반이다. 제선스님의 법명은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왔다”는 뜻에서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일본에 유학해 대학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문관의 전설로 불리는 제선스님.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제선은 대학 졸업 후 제주도로 돌아와 지내자 일본 경찰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런 와중에 부모님은 결혼을 서둘러 하게 해 아들을 얻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며칠 되지 않던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정신적 충격이 심했던 스님은 “금강산 구경을 하고 오라”는 모친의 권유에 한양으로 왔다가 내기바둑으로 돈 100원을 탕진하고 만다.

이 곳 저 곳을 떠돌던 제선스님은 묘향산에 이르러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살이를 하는 스님을 만난다. 이곳에 머물면서 아들이야기를 하게 됐고 이 아이가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서 7일을 밤잠 안자고 기도해 보자는 제의를 받는다.

묘향산 스님은 “7일 동안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진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거든 내 목이랑 부처님의 목을 가져가라”고 호언했다.

그렇게 기도를 하기 시작한 제선은 기도를 시작해 42일 동안 이어갔다. 하지만 아들이 죽은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하고 의구심만 더 커졌다.

“내가 속았어.”

이렇게 생각한 제선은 나무로 된 불상의 목을 떼겠다는 각오로 불단으로 향했다. 그 순간 탁자에 소매가 걸려 넘어졌다. 그때 죽은 아들이 화현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 안으려 들자 아들은 멀어졌다. 아무리 다가가도 멀어지는 아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발로 걷어차자 개로 변했다.

순간 제선은 일본 유학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친척집 집에 자신을 따랐던 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병이 들어 친척집 어른이 버리고 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개를 들판에 버리고 오는데 계속 짖으며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눈치였다.

자꾸 따라오는 개를 버릴 수 없어 교외의 어떤 집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주인은 병든 개에게 된장국에 밥을 말아 주자 다음날 병이 나은 듯 움직였다. 개를 버렸다고 생각한 제선은 있는 힘을 다해 개를 떨쳐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세 달 후 개가 집으로 돌아왔다. 제선이 버린 개였지만 섬득한 눈빛에 광기가 묻어 있었다. 심지어 만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일주일 후 홀연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여기에서 인과의 과보를 절감한 제선은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해 일념으로 참선수행에 매진해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세수 60살 즈음에 도봉산 무문관에서 6년 결사를 마친 제선스님은 하산했다.

이 즈음 종단에서는 대대적인 회향법회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언론사와 방송국에서 대대적인 인터뷰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제선스님은 조용히 도봉산을 내려와 부산으로 내려와 가끔 해운대 백사장을 걷기도 했고 광복동도 배회했다. 부산에서 3일 머문 제선스님은 여수행 배에 몸을 실으려는 상좌 일화스님에게 “중노릇 잘 하려면 인연을 쉬어라”고 조언하며 “이제 됐으니 가라”고 떠밀었다. 이것이 제선스님을 본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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