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선지식들 있어 현재 한국불교 존립 가능

 

中삼론종 학문체계 정립한 
고구려 출신 승랑스님부터 
‘왕오천축국전’ 저자 혜초

‘지장보살 화신’ 추앙 교각 
남종선 법맥 계승한 혜각 
유식학 대가 원측스님 등 

수많은 저술과 정진력으로
한자문화 중국에서도 칭송 
동아시아 불교계에 자존심 

오늘날 한국불교가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데는 ‘오랑캐족’이라는 멸시 속에서도 정진력과 수많은 저술로 한자문화권인 중국의 고승으로 칭송받아 온 구법승들이 큰 힘이 됐다. 사진은 승랑이 머물면서 삼론학을 강의한 섬서성 서안 초당사

10년 전 홀로 중국사찰을 순례했다. 매섭게 추운 겨울, 고대 실크로드 시작점인 섬서성 서안에서 시작해 둔황, 우루무치 부근까지 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다. 버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게다가 바람은 드세고, 끝도 없는 사막의 내레이션이었다. 서역을 지나 인도로 가는 길, 399년 법현 삼장이 구법 길에 ‘해골과 뼈의 이정표를 삼아 걸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7세기 현장법사가 지날 때도 유사했다. 새벽 기도 예불 중에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할 때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수많은 선지식들의 구법정신에 즉금의 불교가 현존할 수 있었음을 떠올리며, 감사 올린다. 

중국 승려들은 자국의 한자로 불교를 공부하지만, 고대 우리나라 승려들은 중국 유학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고대의 한족은 자국만을 제외하고 주변 국가는 모두 오랑캐라고 칭했다. 좋게 보면 자부심일지 모르지만, 오만방자하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이런 민족이 우리나라 구법승들을 고승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나말여초 산문이 개산되기 이전, 우리나라 구법승들의 구도역정을 보자. 

고구려의 승랑(僧朗)은 중국 삼론종의 학문체계를 정립한 인물이다. 승랑은 장수왕(413˜491년 재위)때 구법의 길을 떠났다. 처음 여러 곳을 유력(遊歷)하다가 종남산(終南山) 초당사(草堂寺)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주옹에게 삼론학을 가르쳤는데, 이후 주옹은 <삼론종>을 저술했다. 이후 섭산(攝山, 현 南京) 서하사(西霞寺)에 머물며 주지 소임을 맡았다. 이곳에 머물 때, 스님의 명성에 양무제가 학인 10명을 보내어 수학케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성실론과 삼론학이 불분명했으나 승랑 이후로 삼론학의 학문적인 체계가 정립되었다고 한다. 승랑은 고구려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섭산 서하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론된다. 

지장스님의 육신상이 모셔져 있는 안휘성 구화산의 육신보전

혜초(慧超, 707˜787)는 신라 승려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인 금강지(669˜741, 남인도 승려)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723년경, 금강지의 권유로 바닷길로 인도 동해안에 도착해 오천축 불적지를 순례하고, 육지로 중국에 돌아왔다. 혜초는 10년 정도 인도를 순례하면서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3권을 저술했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했는데, 이때 금강지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혜초는 불공삼장(705˜774, 북인도 출신으로 금강지의 제자로서 당나라 3대에 걸쳐 황제의 귀의를 받음)에게서 법을 받았다. 780년,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거주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 왕오천축국전은 이름만 전하다가 20세기 초, 둔황석굴에서 발견되어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김교각(金喬覺, 696˜794)은 신라 고승으로, 24세 때 당나라로 건너가 99세에 그곳에서 열반했다. 후대 중국인들은 교각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섬기고 있다. 중국에서 4대 불교 성지는 문수보살 도량 오대산(山西省), 보현보살 도량 아미산(四川省), 관음보살 도량 보타산(浙江省), 지장보살 도량 구화산(安徽省)이다. 중국의 불자들은 4대 도량 성지순례를 발원하고 실천에 옮긴다. 김교각스님은 719년 왕권쟁탈에 환멸을 느끼고 당나라 때 안휘성 구화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간 뒤, 산봉우리와 동굴 안에서 뼈를 깎는 수행을 했다. 한번은 스님이 동아봉 큰 돌 위에 앉아 염불하던 중 독벌레에게 물렸는데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계속 정진했다. 이에 산신이 감동하여 미인으로 둔갑하여 약을 갖다 주고 맑은 샘물을 바쳤다. 이때부터 스님이 앉은 돌에서 샘물이 솟았다고 한다. 스님께서 수행할 때, 어느 일행이 산에 왔다가 석굴에서 면벽하고 있는 스님을 보았는데, 발우에는 흰 모래와 소량의 쌀이 담겨져 있었다. 이들은 스님의 정진력에 감화를 받아 사찰을 보시했는데, 구화산 입구에 위치한 화성사(化城寺)이다. 화성사는 757년 구화산의 개산(開山) 사원인 셈이다.

섬서성 서안 흥교사의 규기법사ㆍ현장법사ㆍ원측법사탑

화성사 건립 이후 교각스님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찾아오는 승려와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에서 70여 년을 수행하고, 99세에 좌선한 채 입적했다. 이때, 갑자기 산이 진동하고 돌이 굴렀으며 종을 치니 종이 소리 없이 땅에 떨어지고, 지붕의 서까래도 크게 훼손됐다. 제자들은 스님의 육신을 큰 항아리에 모시고 뚜껑을 봉했다. 3년 후 개봉해보니, 옷은 부패했지만 살은 그대로이고 얼굴색은 생전과 꼭 같았다. 또한 관절에서는 쇳소리가 났는데 석탑 속에 육신을 안장할 때 신비한 빛이 감돌았다고 한다.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전각 안에 모시고, 그 당우를 육신전이라고 하였다. 스님의 육신은 지금도 육신보전(肉身寶殿)에 안치되어 있으며, 2004년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월신보전을 시찰하고 ‘호국월신보전’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상산 혜각(常山慧覺, ?~774)은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최치원의 ‘지증대사적조탑비비’에 이름만 전할 뿐이다. 혜각의 비문이 문화혁명 때, 어느 시골집의 식탁으로 쓰이다 후대에 발견되어 진면목이 드러나 그의 행적이 밝혀졌다. 혜각은 신라 교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향했다. 당나라에 도착한 스님은 그곳에서 선지식을 찾아 10여 년을 발초첨풍하였다. 혜각은 형주 개원사에서 승적을 받고, 이후 하택사의 하택 신회(670˜762) 문하에 머물렀다. 오랜 정진 끝에 신회로부터 남종선의 법맥을 계승했다. 신회가 만년에 탄핵을 받아 유배 길에 오르자,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혜각은 하북성 형주 칠천사에 상주하며 남종선법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다. 이때 수많은 이들이 귀의했으며, 스님은 이곳에서 7~8년 머물다 열반했다. 

원측법사 탑 내부에 모셔져 있는 원측법사상.

또 한분의 구법승이 있는데, 유식학의 대가인 원측(圓測, 612~696)이다. 현재 서안 흥교사 도량 내, 원측의 탑이 현장(玄?, 602˜664년) 법사 탑 좌우로 규기의 탑과 나란히 모셔져 있다. 그러나 현재 비춰지는 것보다 원측은 생전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함께 동문수학했던 규기 법사가 원측을 이단으로 내몰았다. 현장 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유식 강의를 할 때, 원측이 떳떳하지 못하게 몰래 듣고서 <성유식론소>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원측이 신라승이라는 점만으로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원측은 여러 대승경전 및 유식에 밝은 학자였다. 실차난타의 <화엄경> 역경에도 참가했다. 원측의 저서는 <해심밀경소>, <반야심경찬>, <인왕경소> 등이다. <성유식론소>는 현존하지 않지만, 규기의 제자 혜소와 원측의 문하 대현(신라 승), 일본 승려 선주의 저술에 인용되어 있다. <해심밀경소>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티베트 대장경에 입장(入藏)되어 있다. 생전에 측천무후는 원측을 자은사 주지로 임명하였고, 스님이 입적했을 때 고종(649˜683년 재위)은 “짐이 국보를 잃었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신문왕을 비롯해 왕실에서 원측에게 귀국할 것을 요청했으나 원측은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몰두한 것으로 사료된다. 스님의 유식학은 서명파로서 동아시아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원측과 비슷한 시기에 현장 문하에 4대 제자 중 한 승려로 신라의 신방(神昉)과 도륜(道倫)이 있다. 신방은 현장의 한역에 참여해 번역의 일익을 담당했다. 도륜은 규기의 제자인데, 법상종의 논서 <유가사지론>을 주석한 <유가론기>를 저술했다. 

지면상 다 거론할 수 없지만, 고대에 수많은 구법승들이 있었다. 천태종의 석파야(562˜613), 인법사, 실법사, 지황 등이 있다. 또 7세기 초, 신라 유학승 아리야발마는 인도 나란타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공부했으나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입적했다. 이외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이 인도로 갔으나 현태만 고국에서 돌아오고 모두 그곳에서 열반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중국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중심으로 주변 국가는 오랑캐(하열하고 미개인)라고 했다. 하다못해 <육조단경>에 6조 혜능에게 ‘오랑캐족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냐?’는 표현이 나올 정도이니, 한족의 기고만장한 아만심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여튼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인연이다. 고대 우리나라 구법승들의 정진력과 법력이 동아시아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 이런 선지식들이 있었기에 즉금의 한국불교가 존립하는 것이다. 

[불교신문3370호/2018년2월24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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