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 58년 불이(不二)의 개차법(開遮法) 펼친 선지식

제210회 중앙종회 임시회에서 ‘불지종가 국지대찰’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성파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사에 힘쓰면서도 단절된 불교문화 복원이라는 한 길을 묵묵히 걸어 문화포교에 큰 족적을 남긴 선지식으로 꼽힌다.

수행과 방편 넘나들며
선농일치 실천한 스승

사그라진 불교문화 복원
잠시도 쉬지않고 ‘한 길’

종단 어려울때 소임생활
화합위해 멸사봉공 헌신

출가 이후 58년 동안 수행과 방편을 넘나드는 개차(開遮)법을 펼쳐온 조계종 원로의원 성파스님이 3월20일 열린 제210회 중앙종회 임시회에서 제4대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영축총림 통도사 산중총회에서 총림대중 만장일치로 방장으로 모셔달라고 추천한데 따른 것이다.

영축총림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대가람을 형성한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이다. 근현대 구하스님과 경봉스님, 벽안스님, 월하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이 주석하며 불법을 펼쳤으며,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방포원정상요청규(方袍圓頂常要淸規)’의 가르침으로 육화(六和)와 청규에 따라 종문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대도량이다.

불보종가의 상징이라 할 만한 영축총림의 방장 성파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사에 힘쓰면서도 단절된 불교문화 복원이라는 한 길을 묵묵히 걸어 문화포교에 큰 족적을 남긴 선지식으로 꼽힌다.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통도사 전문강원을 졸업한 후 1970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봉암사 태고선원을 시작으로 제방의 선원에 방부를 들이는 등 치열한 정진을 이어갔다. 제방의 여건이 열악했던 당시 통도사 서운암에 무위선원을 열어 납자들을 맞아들여 선풍 진작에도 힘을 기울였다.

서운암에 주석하면서 성파스님은 수행과 방편을 넘나들었다. 사그라진 불교문화를 다시 꽃피우는 길도 이 때 시작됐다. 지화(紙花)로 전해져오는 사찰의 염색문화를 전통 쪽 염색법을 재현해 한 단계 발전시켰다. 쪽 염색을 한 감지, 각종 색지, 들기름을 바른 유지 등을 되살려냈고, 각종 식물의 꽃과 잎, 뿌리, 열매를 사용한 초목 염재를 개발해 단순했던 천연염색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을 열었다.

사경과 선서화의 대가로도 유명한 성파스님은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아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수행은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았다. 닥나무로 직접 한지를 제작하고 쪽물을 들여 감지를 만들어 사경과 서예를 곁들였다. 불화를 그릴 때에는 옻칠도 서슴지 않았다. 쉽고 편한 방식 대신 전통문화를 잇기 위한 스님의 고집스런 열정이 만들어낸 명성이다.

영축총림 방장 성파스님.

성파스님을 중심으로 발전한 서운암 도예는 문화예술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 도예를 병행하며 일찍이 서운암을 중창한 것은 물론 1985년부터 5년여에 걸쳐 흙을 구워 불상을 조성한 도자삼천불과 1991년부터 10년여에 걸쳐 고려대장경의 조성 정신을 잇는 십육만도자대장경 봉안이라는 대작불사를 일궈냈다. 2013년 도자대장경을 봉안한 장경각 불사를 마무리하기까지 28년의 세월을 하루처럼 헌신했다.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성공한 도자삼천불과 도자대장경 불사는 성파스님의 대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월이 되면 들꽃 가득한 서운암이 되는 것도 성파스님의 ‘선농일치’ 작품이다. 부처님에 올리는 공양 중 꽃공양이 공덕이 으뜸이라며 2000년부터 서운암 주변에 야생화를 심었다. 서운암의 꽃밭은 불자들에게 토종 야생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학습장인 동시에 모든 종교인이 어우러진 종교화합의 축제마당이 됐다.

산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성파스님은 시조문학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왔다. 1984년 성파시조문학상을 제정해 최근까지 시조시인들을 격려해온 것이 대표적이다. 1985년부터 영남시조백일장을 개최해오다가 부산시조문학회와 힘을 합쳐 전국시조백일장으로 확대해 운영하고 있다.

수행자로서 일탈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일들에 대해 성파스님은 수행과 일상을 구분하지 않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임을 늘 강조해왔다. 사람들을 수행으로 이끌고자 사찰이 무한대의 학습장을 펼쳐 보이고,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라보는 심연(深淵)의 공부를 일러주는 것이다. 이사(理事)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스님의 지난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성파스님은 선원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납자의 길을 고집하거나 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등 소임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선원에서 정진대중과 함께 하면서도 언제든 소임을 맡아야 할 때는 기꺼이 대중 앞에 섰다. 통도사 주지와 제5,8,9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고, 종단이 어려울 때는 총무원 교무부장과 사회부장을 맡아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종단화합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수행의 길을 걸을 때나 방편을 열어보일 때나 그 바탕에 출가본분사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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