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에게 포교 보다 중한 일이 있나요?”

선원에서 안거 정진 중 출가 10년 만에 두 번째 발심출가한 도갑사 주지 설도스님은 “주지 소임자에게 포교 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며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절에서 살다가 생활출가
선원서 정진 중 발심출가
“도량 지키는 나무 되리”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기도하는 마음 놓기 십상
‘범망경’ 곱씹으며 기도

“선방서 안거정진할 때 보다
주지소임 사는 게 더 어려워
어른 되려면 공부해야”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살았던 청년은 18세 때 사미계를 받았다. 이미 전부터 절에서 승복을 입고 살았기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첫 번째 출가였다.

두 번째 출가는 숨가쁘게 살다가 선방에서 정진하던 때의 일이었다. 첫 번째 출가를 한 지 10년이 지나 있었다. 삶 자체가 출가생활이었지만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고 느껴졌으며 알게 됐다. 비로소 발심했다.

책을 금기시 하는 선방에서 틈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그 중에는 경전도 있었고 에세이집도 있었다. 시집이나 소설도 있었고 잡지도 있었다. 그렇게 불교와 세상에 눈을 떴다. “왜 출가했나?”라는 질문에 그때서야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법과 도량을 지키는 신장이 되겠다고 서원했다. “내 몸뚱이는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더라도 언제나 법당 앞, 그 자리에 서 있는 한그루 계목나무가 되리라.”

계목나무가 되겠다는 그는 영암 월출산 자락의 천년고찰 도갑사 주지 설도스님이다. 승가공동체에 대한 나름의 일깨움이 담겨 있다. 사찰은 대중이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어느 계율에 뒤지지 않는 순위에 위치한다. 지난 수백년, 아니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지해온 승가공동체가 일부 구성원의 일탈로 무너져서는 안된다. 모든 대중이 잘 살 수 있는 도량을 만들겠다는 서원을 설도스님은 출가인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게다.

스님은 <범망경>에 나온 한 구절을 들려줬다. 더 정확히는 계를 설하고 받는 의식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별해탈경난득문 경어무량구지겁 독송수지역여시 여설행자갱난우(別解脫經難得聞 經於無量俱胝劫 讀誦受持亦如是 如說行者更難遇).” 방일해질 때가 적지 않지만 이 구절을 떠올리며 자신을 되잡곤 한다. “한량없는 세월을 지나도록 별해탈경은 얻어듣기 어렵다네. 독송하고 수지함도 이와 같으니, 설한 바와 같이 행하는 자는 더욱 만나기 어려워라.” 이처럼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기도하는 마음을 놓치기 십상이라고 했다. 부처님 전에 설 때마다 곱씹으며 절을 했다. 불자의 삶이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고 설도스님은 강조했다.

2012년 처음 주지를 맡았다. 그것도 제22교구본사 대흥사의 수말사 중 하나인 영암 도갑사였다. 초임 주지에게는 과분한 사찰이었다. 도갑사는 해탈문이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유산이고, 문수보현동자상과 오층석탑, 석조여래좌상이라 명명된 미륵부처님 등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설도스님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 만큼 한 사람이라도 더 포교하고 불법을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며 “주지에게 포교 보다 중한 일이 있겠느냐”고 했다. 불교세가 약한 전라도에서 도갑사는 결코 비중이 적지 않은 사찰이라는 점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광주와 목포, 나주가 인접해있고 무안 남악신도시, 나주 혁신도시가 지척에 있어 해야할 일도 많았다.

외부에서 바라본 주지와 직접 소임으로 닥친 주지는 많이 달랐다. 처음엔 ‘도와주는 입장과 주인의 입장이 이렇게 다른가?’하고 생각했다. 의지와 관계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젊은 나이에 큰 절 주지를 맡다보니 든 생각이었다. 소임이 사람 만든다는 말도 절감하게 됐다. “도갑사 주지를 맡았을 땐 제가 하는 한마디 말과 행동에 신도들의 반응이 매우 놀랐다”며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소임의 무게란 이런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고 했다.

신도들에게 법문을 할 때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매번 법문 준비를 철저히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늘 부족하고 아쉽다. 어떨 때는 법당을 나설 때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은 그날의 법문을 다시 돌아본다. 행여나 내용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인용이 잘못 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본 뒤에야 마음이 놓인다. 설도스님은 “신도들이 그냥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중에 다시 묻거나 문자메시지로 확인할 때가 있다”며 “어른이 되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선방에서 정진할 때 보다 주지 소임을 사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도 했다. 선방에서는 명확한 목표를 두고 자신과 싸울 뿐이지만 소임자는 정해지지 않은 모두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들게 해온 6년이지만 돌아보면 흐뭇한 때가 많다. 갈수록 시골은 사람이 줄고 있지만 도시가 멀지 않아 유입되는 신도가 점점 늘었다. 신도가 줄어 힘들다는 다른 사찰 스님들의 얘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도갑사는 그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불교대학도 기수별로 뭉쳐 사찰 일을 자신들의 일인양 알아서 척척 해내고 있다.

신도층의 변화도 다소 긍정적이다. 60대 이상이었던 신도 연령층이 50대로 낮아졌고 40대 신도들과 부부 신도들이 꽤 늘었다. 매년 여름 개최하는 어린이불교학교도 한해 150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어 공을 들인 보람이 있다. 어린이불교학교는 학부모가 절과 인연을 맺게 되는 수단이 되기도 해서 감동 두배가 되기도 한다. 설도스님은 “젊은 주지가 열심히 기도한다는 입소문이 돌았다는 말을 신도들에게 전해 들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된다”며 쑥스럽게 말했다.

요즘 설도스님의 고민은 템플스테이다. 특화된 프로그램으로 오랫동안 진행해왔지만 최근 참가자를 모으기가 부쩍 힘들어졌다.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담당하는 스님이 바뀌는 일이 생기고 실무자가 그만 두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템플스테이가 고민거리가 돼 버렸다.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워 담당할 스님과 실무자를 구하는 일은 더 어렵다. “역대 스님들 때부터 외진 곳에 있어도 템플스테이 하나 만큼은 열심히 해왔는데….” 말 끝을 흐리는 설도스님의 표정에서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스님은 언제나 그랬듯 부처님 앞에 서서 “별해탈경난득문 경어무량구지겁 독송수지역여시 여설행자갱난우”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자신을 다잡을 것이 뻔하다.

도갑사 천불전 앞에 선 설도스님.

■ 설도스님은 …

18세 되던 1995년 제22교구본사 대흥사에서 범각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같은 해 해인사에서 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99년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직지사에서 청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2004년 해인사 율원을 졸업한 뒤에는 해인사 총림선원, 신흥사 향성선원, 성륜사 금강선원 등 선원에서 안거정진했다. 대흥사에서 재무국장과 포교국장 소임을 맡은 뒤 총무원 호법부 호법과장을 맡아 중앙의 소임을 경험했다. 2012년 도갑사 주지로 부임해 대중 살림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제16대 중앙종회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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