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한국 禪사상사] <7> 도의국사 上

 

서당법맥 받은 中 개원사에는
‘조계종조 도의 입당구법비’… 
백장에겐 ‘선지식’ 인정받아

화엄 익하고 입당했던 구법승
선종 우세 당나라서 禪 공부
신라 입국하며 선사로서 활동

새로운 사회건설 원하는 정국
심성 닦는데 힘쓰는 禪 수행법 
혁신성 띠고 있어 호족들 환영

일전에 어느 학술 모임에 참가했는데, 필자 옆자리에 퇴임한 한국불교 전공 교수님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불교사에서 최고의 고승이 누구라고 보십니까?” “의상대사와 원효스님입니다.” 잠깐 숨도 고르지 않고 말씀하신 답변에 놀라지 않았다. 개인마다 의견 차이가 있지만, 불교학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분들이 원효와 의상이기 때문이다. 

신라말 선종 발전한 이유 

신라의 원효(617˜686년)와 의상(625˜702년)대사는 출발점이 같다. 두 분이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의 유식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당항성에서 한밤중에 해골물을 마신 원효는 다음날에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고, 의상은 입당했다. 한분은 뒷걸음질, 한분은 전진해 나아갔다. 과정상 해탈의 길이 다르고, 중생교화 방편이 다를 뿐, 두 분에 대해 어떤 저울질에 의미가 없다고 본다.

원효는 귀족적인 불교에서 탈피해 양반의 전유물로 여기던 불교를 노비와 서민층도 공유할 수 있다는 평등의식을 부여했다. 원효에게서 화엄과 유식 사상에서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인 화쟁(和諍) 사상 등이 도출됐다. 또 원효처럼 동시대 민중들에게 불교를 대중화한 대안(大安) 혜숙(惠宿) 혜공(惠空) 등이 있다. 

조계종은 종헌에 종조는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로 명문화했다. 서당지장 선사의 법맥을 받은 중국 강서성 남창 우민사(당시 개원사)의 ‘도의조사 입당구법기념비’.

의상은 입당해 화엄종의 2조 지엄(602˜668년) 문하에서 법장(643˜712년)과 함께 동문수학했다. 의상은 귀국 후 영주 부석사에 화엄도량을 건립했다. <화엄경>을 강설하고, 10여 곳에 화엄종 사찰을 창건한 의상대사는 곧 해동 화엄종의 개조(開祖)가 된다. 이후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되고, 신라 하대에 선종과 대립 혹은 공존했다.

신라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오기까지 주류 불교학은 의상의 화엄학과 유식학이다. 그런데 화엄종은 의상대사와 그 직제자에 이르는 시기까지 실천적 성격이 강했으나 8세기 이후로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 한편 유식은 원측법사의 서명학파가 신라에 유입되어 유식학이 잠깐 유행하였으나 8세기 중엽부터 쇠퇴하였고, 진표율사에 의한 법상종은 실천적 종교운동으로 전환했다. 

우리나라에 선(禪)이 유입되기 전, 신라 말기는 화엄사상이 팽배했다. 전반적으로 당시 구법승들은 화엄학을 공부하고 입당(入唐)했다. 대부분의 선사들이 교를 익히기 위해 입당하지만, 당시 당나라에서는 화엄종은 규봉 종밀(780˜841년)로 단절되었고, 더 이상 화엄학이 크게 발전되지 못했다. 즉 8세기 중반 무렵부터 중국은 선종이 우세하였으므로 우리나라 구법승들은 자연스럽게 선(禪)을 하였고, 신라로 입국할 때는 선종의 선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신라 사회는 경덕왕(742˜764 재위)이 서거한 이후,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회변동을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체제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신라 말기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는데, 정치적 혼란기임을 드러낸다. 그 원인은 골품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붕괴현상에서 사회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첫째, 골품체제의 모순에서 진골 귀족끼리 치열한 왕위 다툼이 있었다. 중앙왕실에서는 방계(傍系) 김씨 왕실이 등장하여 치열한 왕권 투쟁이 있었다. 둘째, 중앙의 하급 귀족인 6두품은 진골 귀족의 출세에 제약을 느끼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골품제도의 모순으로 경제 체제까지 붕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두 원인으로 해서 중앙정치가 혼미해지자, 지방과 해상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곧 지방의 호족들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 지방의 백성들을 독자적으로 지배하였고, 어떤 호족은 해외 해상활동을 하여 해외무역을 시도했다. 이런 와중에 농민들은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구족계를 받은 광동성 광주 대감선사(당시 보단사),

이와 같이 불교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이념이 요구되었다. 이런 사회 모순에 신라 말기에 선종이 발전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첫째는 복잡한 교리를 떠나 심성을 닦는데 힘쓰는 선종의 수행 방법이 호족들에게 호감을 샀다. 둘째는 선종 자체가 혁신성을 띠고 있어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원하는 6두품과 호족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즉 개인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은 호족들이 중앙왕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것과 맞물려 선종을 선호한 것이다. 

서당 법맥 잇고 백장도 인정

현재 조계종 종헌 제2장 6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본종(本宗)은 신라 헌덕왕 5년(813년)에 조계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道義)국사를 종조(宗祖)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청허와 부휴 양 법맥을 계승한다.” 또한 조계종 종헌 서문에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 종조 도의국사께서 조계의 정통법인을 사승하사 가지 영역에서 종당을 게양함으로부터…”

9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 도의국사는 현 조계종의 조사로서 조계종에는 6조 혜능을 비롯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년)·서당지장(西堂地藏)의 선풍(禪風)이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도의(?˜825년)선사는 북한군(北韓郡, 현 서울) 사람으로 성이 왕씨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784년) 당나라로 들어갔다. 입당(入唐)하여 바로 오대산(문수보살 성지, 현 山西省)으로 가서 기도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감응을 받아 공중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신령스러운 새가 날아오는 신이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당집>에 도의선사의 중국 행적이 나온다. 도의 선사는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육조단경>의 설법 장소인 보단사(寶壇寺, 현 大鑑禪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훗날 조계산(현 廣東省 韶關 南華寺)으로 옮겨갔다. 도의선사는 6조 혜능을 모신 조사당에 이르러 참배를 하려고 하는데,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고, 3배를 올리고 나오니 또한 문이 닫혔다는 신이한 고사가 전한다. 물론 이런 고사는 진위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도의가 당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미친 법력과 영향력이 반영되어 후대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도의를 통해 혜능의 선법과 정통성을 연계하면서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以心傳心) 법맥을 상징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후 도의는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 현 佑民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년)을 참알하고 의심하고 있던 바를 물어 그 의문점을 풀었다. 서당은 마치 돌더미에서 아름다운 옥(玉)을 얻은 듯 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것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진실로 법(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

백장회해 선사로부터 심인을 얻은 강서성 봉신 백장사 전경.

서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도의는 깨달음을 얻었고, 명적(明寂)에서 도의(道義)라는 호를 받았다. 도의선사가 개원사에서 스승 서당을 만나고 법맥을 받은 장소라고 해서 2008년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개원사 도량에 ‘조계종 종조(宗祖) 도의조사 입당(入唐) 구법기념비’를 세웠다. 도의는 서당 문하에서 수행한 뒤, 백장청규를 제정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년)선사가 살고 있는 백장산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도의는 서당을 모시는 것과 똑같이 백장회해를 스승으로 섬겼다. 어느 날, 백장이 도의의 정진력에 감화를 받아 선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東國)의 승려에게 넘어가는구나.” (<조당집> 중)

도의선사는 마조 문하의 제자인 서당에게서 법맥을 받고, 백장에게서도 인정을 받아 대선지식으로서의 법력에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신문3378호/2018년3월24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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