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나업과 부인의 사랑 이야기
불상 복장에 담겨 400년 뒤 전해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더 큰 감동

천년 넘게 민족과 함께 해온 사찰
문학 요소 갖춘 이야기 담겨 있어

자주 가보지 못하는, 그러나 항상 마음 속 해와 달처럼 기리는 속초 영랑호변 보광사에 봄이 와 있을 것이다. 영랑호변 잔잔한 물결에 봄 기운이 머물고, 바람이 스쳐 떠난 자리에 꽃들이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보광사를 맴돌던 꽃바람은 멀리 설악 영봉을 넘어 금강산으로 묘향산으로 흩날려 금수강산으로 수놓을 것이다. 

영랑호 보광사는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사찰이다. 몇 년 전 여름 시나리오 <이화중선>을 이곳에서 완성했고, 그 해 가을 내 강의를 듣던 학생들과 단편영화 <우는 여자>를 촬영한 무대이기도 하다. 영랑호와 보광사를 산책하던 그 때가 마치 거울에 비친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보광사를 연모하게 된 것은 영랑호의 아름다운 물결,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설악, 넘실거리는 동해 때문만은 아니다. 예사로 넘겼던 불상에 담긴 애절한 사랑을 알고 나서 연모는 몸살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의 복장을 우연히 열게 됐다. 그러자 그 속에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불상은 내관의 부인이 남편을 위해 조성했음이 드러났다. 내관 나업은 조선 중기 환관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을 오가며 외교적인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청 황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인조의 칙사로 북경을 다녀오는가 하면(승정원일기), 효종 때는 청나라의 새 배필을 조선에서 구한다는 밀지를 전하기도(효종실록) 했다. 인평대군을 청으로 배웅하는 가슴 아픈 책무를 맡은 이도 나업이었다. 내관 나업은 그 시절 격동기에 전쟁과 환란을 거치면서 수많은 죽음과 참상을 목도해야 했던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한씨 부인은 평생 나랏일로 분주했으나 이승의 고단한 삶을 산 남편을 영원히 기렸다. 그 마음이 1654년 8월 금강산 안양암에 안치된 목조지장보살 좌상의 발원문에 담겨 400년이 지나 우리 곁에 왔다. 

불상 조성 내력을 담은 유물을 확인한 사찰과 문화재 관계자들은 놀라면서 환호했다. 왕이나 왕족 지방 유지를 기리며 조성한 불상은 많았지만 내관과 그 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불상은 처음이었다. 역사적으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기에 그 감동은 더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하는 감독으로서 필자 역시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불멸의 러브스토리가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놀라움에 목이 매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더한 감동과 흥미를 담은 러브스토리였다. 경북 안동에서 남편의 사랑을 담은 수백년 전의 애달픈 사부곡이 담긴 글이 머리칼과 함께 발견된 소식을 접한 적이 있으나 이처럼 구체적인 사연은 처음이었다. 보광사 경내를 거닐 때 마다 마치 나업과 한씨 부인이 사랑을 하던 그 때를 함께 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천년을 넘게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사찰이기에 만나는 역사며 감동이다. 다만 우리가 모르거나 예사로 지나칠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로 애니메이션으로 문학 작품으로 대중과 다시 만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스토리는 세계인들의 눈물샘을 자아낼 수 있는 모든 구성요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 사찰을 더 사랑하고 자주 찾고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다. 나업과 한씨 부인을 알고 나서 봄이 되면 더 그리운 보광사다. 

[불교신문3378호/2018년3월24일자] 

백학기 논설위원·시인·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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