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조계종 스님들,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에 가다<上>

해외문명기행에 참여한 스님들이 피라미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계종 교육원(원장 현응스님)의 승려해외연수가 중동으로까지 지평을 넓혔다. 지난 1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된 ‘혜국스님과 함께하는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해외문명기행.’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스님을 비롯한 49명의 종단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등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의 역사문화가 숨 쉬는 세 나라의 유적지를 돌아봤다. 

불교가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조차 얼마 살지 않는 이역만리. 어딜 가도 뜨겁고 각박한 사막의 기후 속에서도, 스님들은 이웃종교의 발자취를 부지런히 보고 듣고 물으며 견문을 키웠다. “세상을 좀 더 폭넓게 바라보고 그래서 더욱 기꺼이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얻는 기회가 됐다”는 승려해외연수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다.

최고의 높이와 규모를 자랑하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

<이집트...세계 최초의 문명>

지구 반대편을 향한 길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까지 10시간, 3시간의 대기를 거쳐 다시 3시간을 날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했다. 이틀에 걸쳐 다다른 도시의 첫 방문지는 피라미드. 230만 개의 돌덩이를 반듯하게 잘라서 쌓아올린 고대 제왕의 무덤은 세계 최초의 문명이었던 이집트문명의 아이콘과도 같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화강암을 마치 떡 주무르듯 했다던 이집트인들이다. 

가장 큰 피라미드는 쿠푸(Khufu) 왕(재위 기원전 2589?∼ BC 2566)의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20년 동안 만들었다. 높이 146미터 700만 톤 무게의 왕릉은 4600년의 시간을 거뜬히 견디고 있다. 쿠푸의 아들 카프레 왕이 조성한 스핑크스의 위용도 사진으로 보던 그대로다. 역대 파라오들은 즉위한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해 신계(神界)로 가기 위한 길을 닦았다.

쿠푸의 아들 카프레 왕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조성한 스핑크스.

사실 피라미드는 장관이지만 그걸 쳐다보는 일은 자못 불편하다. 노예제는 고대사회를 대표하는 특징이자 폐습이다. 피라미드의 압도적인 성과는 정복한 국가들에서 끌고 온 수많은 노예들에게서 짜낸 고혈의 결과물이리란 짐작.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생산한 통설이다. 그러나 고고학자 마크 레너와 자히 와하드 등의 주장은 이를 뒤집고 있다. 

정부와 동등한 계약을 맺은 일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역작이었다는 견해다. 이들은 풍족한 임금을 받았고 하루 8시간만 일했으며 8일을 일하면 2일을 꼬박꼬박 쉬었다. 채찍질도 없었고 휴일에도 돈은 나왔다. 심지어 일당이 밀리면 파업을 일으켰고 피라미드 옆에 자기를 위한 무덤을 세우기도 했다. 

‘나라님’도 애민(愛民)의 실천이란 관점에서 대역사를 일으켰다. 백성들은 국가의 젖줄인 나일 강이 봄철에 범람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곧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이들을 위한 일종의 복지 또는 뉴딜정책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노동이라고 여겼다면 과연 이걸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해질녘에 바라본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단지 노동으로만 여겼다면
이걸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1800년에 완공된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이 200여 년이 지난 지금 16.8cm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반면 피라미드는 5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겨우 1.2cm 내려앉았을 뿐이다. 그 완벽한 견고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은 피라미드에서 신과의 합일을 꿈꿨고 백성들은 신이 된 임금에 힘입어 자신들도 복을 받으리라 믿으며 열심히 땀 흘렸을 것이다. 나는 피라미드가 단지 노역의 결실이라고 보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명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 이집트인들의 강력한 신심을 배워 성불(成佛)을 하는 것으로 회향하기를 여러분에게 바란다(혜국스님).”

피라미드에 대한 소감을 밝히고 있는 혜국스님.

물은 생명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 강이 세계 최초의 문명을 이룩했다. 특이하게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줄기다. 적도 부근에서 발원해 지중해로 흡수된다. 나일 강을 영토 안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스완(Aswan)은 이집트의 최남단 도시다.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1시간40분 정도 걸린다. 이집트 왕조사에서 제일 강력했던 군주인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대신전을 둘러봤다. 왕비 네페르테리를 위한 하토르 신전도 자기 옆에 자기 것보다 작게 세웠다. 

버스로 4시간을 달려 북상하면 또 하나의 세계불가사의인 룩소르(Luxor)를 만난다. 3000년 전 이집트의 영광을 흔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나일 강 주변을 제외하면 국토는 온통 사막이거나 돌산이다. ‘카르나크’ ‘핫셉수트’ ‘멤논’… 곳곳에 즐비한 낯선 이름의 성전과 석상들은 태양신의 전능과 파라오의 덕화를 지금껏 찬양하고 있다. 다만 뙤약볕 아래서 군데군데 부서진 채로 서 있다. 로마제국과 이슬람제국과 대영제국이 그 치욕과 손괴의 길을 짓밟으며 지나갔었다.

아부심벨 대신전을 방문한 순례단.

흥망성쇠의 순환 속에서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인가

“특히 이번 연수는 타종교의 문화를 둘러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스님으로서 개인적으로 왔다면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인 여행이다. ‘교육’이라는 정당성이 있고 더구나 여러 선배와 도반 스님들이 같이 한다는 점에서 종도로서 뿌듯함을 느낀다. 이집트왕조는 낙원에 필적할 번영을 누렸을 것이나 끝내 쇠락했다. 제행무상의 현장에서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불성(佛性)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서울 성림사 주지 현담스님).”

끝없이 펼쳐진 사막. 멀리 호수처럼 보이는 부분은 신기루다. 실제로는 없다.

룩소르에서 카이로까지 밤새 10시간을 달리는 침대열차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모카탐 동굴교회와 예수피난교회.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 이집트는 서기 640년 이슬람의 치하에 들어갔다. 오늘날 이집트 인구의 87%는 이슬람교 신자인 무슬림이다. 나머지 13%는 기독교 신자다. 기독교의 분파 가운데 하나인 콥틱(Coptic) 정교회 소속. 

“무신론자들은 이 나라에서 짐승 취급을 당한다”는 게 이집트에서 30년을 거주한 가이드의 전언이다. 소수인 만큼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에 자리한다. 예수가 몸을 숨기거나 그들의 추종자들이 몰래 예배를 보던 마을에는 현대의 추종자들이 쓰레기 재활용으로 생계를 꾸린다. 

무슬림들에게나 크리스천들에게나 종교는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태어나 처음 울고 숟가락을 들 듯이 부모의 종교가 주어진다. 그럴 일도 없지만 만약 무슬림 가족 구성원이 기독교로 개종하겠다고 하면 그를 죽여도 가벼운 처벌만 받는다. 이른바 '명예살인.' 

사막에 던져진 사람들은 운명적인 세계관의 안쪽에 평생 몸담으며 다른 세계관을 거부하거나 미워하다가 삶을 마감한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모두의 성지인 마지막 여행지 예루살렘에서 그 '장벽'을 더욱 선명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울러 숙명으로서의 종교에 정치가 개입하거나 석유가 끼면 응당 전쟁으로 자라난다.

모카탐 동굴교회에 있는 예수 탄생을 암시하는 장식. 이슬람을 대표하는 언어인 아랍어로 쓰인 마태복음의 구절이 인상적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구경한 스님들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편 매일 아침 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송하고 발원문을 읽으며 출가 수행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발원문은 보령 세원사 주지 정운스님이 썼다. 

“…수행자라는 개개인의 존엄함, 창조의 주인임을 사무치게 깨닫게 하는 이 공덕으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다지고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세상을 밝게 보는 눈을 뜨게 하소서.” 날마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쉴 새 없이 이동하며 '참나'를 구했다.

고대 유적지 룩소르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 입구.
이집트=장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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