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제22교구본사 대흥사에서 서산대사 탄신 498주년을 맞아 호국대성사 서산대제가 봉행됐다. 사진은 일주문에서 보현전까지 서산대사 위패를 이운하는 예제관의식. 김형주 기자

금산에는 사적 105호로 지정된 칠백의총(七百義塚)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성 전투에서 왜병과 싸워 전사한 의병들의 무덤이다. 금산성 전투에서는 조헌이 이끈 700명 의병만 알려져 있을 뿐, 영규대사와 함께 목숨을 바친 800명에 달하는 승병의 이야기는 없다. 당시 영규대사와 800명의 스님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조헌과 의병들을 구하기 위해 금산성으로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금산성에서 혈전 끝에 우리 군은 모두 전사했다. 조헌의 제자들이 나서 의병들 시신을 수습해 칠백의사총이라 했다. 그러나 유생들은 함께 전사한 승병을 예우하지 않았다. 숭유억불이 만연했던 조선시대라도 스님들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승병의 헌신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호국’ 일념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도
나라 백성위해 떨치고 나와
완벽한 이타행 실천한 스님

조계종은 지난 2014년 8월 ‘호국의승의 날’ 국가기념일 제정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이래 지금까지 ‘호국의승의 날’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오고 있다. 나라를 지키고 전쟁으로 핍박 받는 백성들을 위해 스님들은 위기 때마다 분연히 일어났다. 비단 임진왜란만이 아니다. ‘호국’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국불교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명랑법사가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법을 통해 당나라 침략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고, 화랑을 이끌었던 신라 원광국사는 ‘세속오계’를 통해 호국을 가르쳤다. 또 <고려사>에는 거란군 침입 때 나선 스님들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1010년 거란군이 침입해 법신(法信)스님이 병사 9000명을 이끌고 나섰다가 스님은 전사했다. 또 고려 고종 재임 중 원나라군이 침입했을 때 지순스님이 원나라 총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를 물리쳤고, 1254년 원나라 장수 차라다가 침입했을 때 황령사(黃嶺사) 홍지스님이 장수들을 물리쳐 돌아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정책은 훼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뤄졌다. 태조 이성계는 금강산에 사리장엄구를 조성할 정도로 호불 군주였지만, 태종은 고려시대 11개에 달했던 종단을 7개로 축소시켰다. 성종은 도첩발급을 폐지해 출가할 수 있는 통로를 막았고, 중종은 경국대전에서 도승제를 없앴다. 왕비나 상궁, 민중들은 불교를 신행했지만, 제도적으로 불교는 인정받지 못했던 시간이 이어졌다. 

명종대에 이르러 문정왕후가 섭정하던 10년 시간은 천재일우와 같은 기회였다. 승과가 살아나면서 인재들이 출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때 출가했던 스님들이 서산대사로 알려진 청허휴정스님과 사명유정스님이다. 두 스님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을 지낸 서산대사는 도움을 청하는 선조에게 “나라 안의 모든 스님들을 총동원하여 왜적을 몰아내는 싸움에 앞장서게 하겠다. 늙고 병든 스님들은 절에서 도적이 물러나길 기도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평안남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2500 승군을 결집한 스님은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한양을 수복했다.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선조를 호위한 것도 700명의 의승들이다.

사명대사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의승군 도장군이 된 스님은 사명대사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했고, 후퇴하는 왜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적진에서 적장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회담을 주도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금오산성, 팔공산성, 남한산성 등 산성을 축조하고, 무기도 만들었다. 1607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만나 담판을 짓고 전쟁 때 끌려간 포로 3000명과 함께 귀환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앞서 청주성 탈환을 주도하고 금산성 전투를 지원하다 입적한 영규대사 뿐만 아니라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처영대사도 빼놓을 수 없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처영스님은 대흥사, 백양사, 금산사 등 호남지역 스님들 1000여 명과 금산 배고개 전투, 수원 독왕산성 전투를 승리하고 행주산성을 방어한 주인공이다.

스님들의 활약은 육지에서만 펼쳐진 것은 아니다. 영화 ‘명량’ 속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배 위에서 장렬히 싸웠던 스님들을 떠올려보자. 충무공해전에서 의승수군의 역할은 컸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의로 참전한 스님들은 군량도 스스로 조달하며 왜군과 싸워 바다를 지켜냈다. 이순신 장군도 의승수군이 없었다면 승리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는 28일은 임진왜란 당시 옥포대첩,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을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이다. 국가에서는 애국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며 1967년부터 ‘충무공 탄신일’을 제정했다. 뿐만 아니다. 매년 6월1일은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섰던 의병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10년부터 기념일로 제정했다. 매년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이들을 추념하는 행사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린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1700년 동안 스님들은 자비와 애민정신으로 호국을 실천했다. 삼국시대 외침과 통일에 일조했고, 고려시대 거란과 몽고의 침입 때도 흔연히 일어났다. 조선시대 스님들은 제도권 밖의 소외계층이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물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나라를 지키는 주역이었다. 그런 의승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나마 역사서에 이름이라도 남았다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기록에도 없는 많은 스님들이 잊혔다. 추모할 후손조차 없어 더 안타까운 스님들이다. 스님들이 순국으로 보여준 호국의 정신을 국가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불교신문3385호/2018년4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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