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원나라 양식 혼합·절충된 작품

원나라 장인이 만든 종으로
음통이 사라진 쌍용의 용뉴
종 끝 나팔꽃 모양 곡선 특이

전란으로 고려 장인사회 단절 
기술적 역량 퇴보 잘 보여줘 

중국 원나라 장인의 손을 빌어 만든 북한 국보유적 124호 연복사종은 고려 1346년에 높이 3.2m크기로 조성됐다.

원나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고려 후기에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불교미술품이 제작됐다. 원나라의 순제(順帝)와 기황후(奇皇后)가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를 중창하고 무진등(無盡燈)을 발원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또 금강산을 배경으로 고려 태조(太祖)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을 친견한 장면을 그린 노영(魯英)의 담무갈·지장보살 현신도(1307년)를 비롯하여 금강산에서 출토된 두 구의 금동보살좌상, 이성계(李成桂) 발원 사리기 등과 같이 라마 양식을 따른 불교미술품이 금강산 일대에서 제작됐다. 이는 원(元)과 고려 왕실이 금강산을 신성시 한 불교적 배경과 연관할 수 있겠다. 

연복사종 또한 이런 맥락에서 조성됐다. 연복사종은 강공금강(姜公金剛)과 신후예(辛候裔)라는 두 사람의 중국 장인이 주조했다. 이 종은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건너온 중국 장인이 금강산에서 종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 충목왕(忠穆王)과 공주의 발원으로 연복사(演福寺)의 옛 종을 다시 만든 것임을 기록된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지정정해 령자정원사 강공금강, 봉천자지명, 내주대종, 각이현지우점지상(하략) (至正丁亥 令資正院使 姜公金剛, 奉天子之命, 來鑄大鍾, 閣而懸之于岾之上(下略)’, (이곡, ‘동유기’ <동문선>권71기). 이후 조선시대의 기록인 <속동문선(續東文選)> 권21 ‘유송도록(遊松鄕錄)’에도 ‘연복사에는 추려(追)가 심히 고아하고 종면에 이곡(李穀)이 기(記)를 새긴 종이 있다’고 하여 연복사에 오랜 기간 이 종이 그대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57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강세황(姜世晃)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의 ‘개성남문루도(開城南門樓圖)’에는 이 종이 연복사가 아닌 개성 남문 위에 걸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그림이 그려졌던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연복사가 폐사된 듯 종이 개성 남문루로 옮겨졌으며 그 시기는 채수(蔡壽)가 ‘유송도록’을 기술했던 16세기 초 이후부터 18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연복사종이 걸린 황해북도 개성시 남문루.

현재도 이 연복사종은 그때 이후 그대로 북한 개성의 남문루(南門樓) 위에 걸려 있다. 그 형상을 살펴보면 높이가 3.2m에 직경이 2.03m에 이르는 대종으로서 정상부에는 한국 종의 단룡과 달리 음통이 사라진 쌍용의 용뉴로 구성되었고 종신 어깨 부분에는 범자문이 장식된 방형 연판을 유려하게 둘렀다. 종신의 중간에는 여러 줄로 융기된 횡대(橫帶)를 둘러 상·하 부분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상·하면에는 각각 결박형의 방형 구획을 만들어 상부의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삼존불(三尊佛)로 구성된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사방불 형식으로 시문하였다. 

또한 이 사방불 사이의 구획마다 위패(位牌) 모양의 원패(願牌)를 장식하여 그 안에는 각각 ‘불일증휘(佛日增輝)’, ‘황제만세(皇帝萬歲)’, ‘법륜상전(法輪常轉)’, ‘국왕천추(國王千秋)’의 명문을 새겨 넣었다. 이 원패에는 세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연복사종의 주조 기술이 당시로서도 매우 뛰어났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하부의 방형 구획에는 앞서 동문선에 기록된 ‘연복사신주종명(演福寺新鑄鐘銘)’이 빽빽이 양각되었는데,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동문선에 수록된 내용 외에도 문장 뒷부분에 몇 줄의 글이 더 있으며 시주자 명단, 그리고 첫줄의 ‘지정육년(至正六年)…’ 앞에 ‘대원(大元)’이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동문선의 편찬자가 이 종명을 싣는 과정에서 일부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시킨 것으로 보이며 첫 머리의 대원의 문구는 의도적으로 제외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종신의 중단에 있는 횡대 바로 아래, 위로는 각각 범자(梵字)와 팔리어를 가득히 새겨 놓았다. 그 아래로는 파도문과 동물문이 장식된 하대를 만들었으나 종구(鐘口)에서 훨씬 상부로 치우쳐 있으며 하대 아래로 팔궤(八卦)가 배치된 점도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종구 쪽으로는 문양이 없이 폭이 넓은 하대를 두었고 그 끝부분도 마치 나팔꽃 모양으로 팔릉형(八稜形)으로 굴곡지게 처리하여 우리나라 전통의 범종양식과 판이하게 다른 중국종의 형태와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은 연복사종이 당시 중국 원대의 종 양식을 적용한 것으로서 이는 두 사람의 중국 장인에 의해 총괄적인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종신에 새겨진 양각명(銘)

그러나 연복사 종에 보이는 몇 가지 독특한 요소와 특히 이 종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이 종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파악된다. 우선 이 기록에서는 “그때 산 근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다투어 이 공사(鑄鐘)에 달려와 생활을 유지하였다(時旁山諸郡飢, 其民爭趨工得食生活)”고 하여 당시 종을 주조할 때에는 많은 수의 일반 백성이 노역에 참여한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대덕2년명(大德二年銘, 1298)종과 같은 원대의 종이 대부분 철종(鐵鐘)이면서 방형 구획이 아닌 결박형의 가사문대(袈裟帶文)를 둔 점이나 종구가 나팔형으로 크게 벌어져 보다 굴곡진 팔릉으로 구성된 것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물론 연복사종이 이보다 약 반세기 뒤에 제작된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재질이 철제가 아닌 청동이며, 위패형 명문구와 사방불(四方佛)이 시문된 점, 그리고 종구가 아직까지 크게 벌어지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까지 우리나라 종의 양식이 일부 잔존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종과 원대 종 양식이 혼합, 절충을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연복사종과 같은 대종을 새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이를 만들 기술자를 구하지 못해 결국 중국 장인의 솜씨를 빌어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은 오랜 기간의 전란 이후 극도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던 고려 장인사회의 단절이나 기술적 역량의 퇴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장인 사회의 침체를 볼 수 있는 단편적인 기록이 있어 주목되는데, 원나라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공인(工人)을 보내주길 요청하나 그에 대한 거절의 답변을 담은 ‘송철리타관인서(送撤里打官人書)’라는 이규보(李奎報)의 서간(書簡이 그것이다. 

이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공인(工人)들이 적어 모자라고 기근과 질병으로 많이 죽었으며 또 귀국(貴國)의 빈번한 침략으로 해를 당하여 그로 인해 흩어져 버리거나 농민이 되는 등 전업(專業)을 한 자가 많은 고로 부득이 보낼 수 없다”(<동국이상국집> 권28, 서(書)·장(狀)·표(表), ‘송철리타관인서’ 및 동문선, 권61 서)고 하여 당시에 우리나라의 장인이 전란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쌍용의 용뉴.

이를 반영하듯 이 시기에 명문이 있거나 양식적으로 뛰어난 금속공예품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여기에 원대의 침입과 복속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문화 전반에 걸친 외부적인 자극과 그 수용을 통해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초기의 종은 중국 종 양식을 반영한 새로운 요소가 크게 유행을 하게 된다. 즉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떨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가 아예 없어진다. 또한 종신의 중단쯤에는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횡대(橫帶)와 유사한 두, 세 줄의 융기선 장식이 첨가되며 하대가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배치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1392년에 제작된 남한산성의 장흥사종(長興寺鐘, 139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약하나마 고려시대의 전통형 범종을 계승한 작품도 간간이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도 계승을 이룬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 전기에 왕실 발원 범종이 주로 중국종 계열을 따른 작품이라면 사찰의 범종은 이러한 전통 범종을 고수함으로써 조선시대 범종은 시대별, 제작자별로 다양한 형태와 양상을 지니며 꾸준히 제작된다. 

[불교신문3385호/2018년4월18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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