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낸 이형근 시인 인터뷰

공학도 출신 성공한 기업인
강화도 하늘재에 황토방 짓고
불교 천착 ‘茶禪一味’ 그대로…

50여년 詩作 80여편 첫 시집

전기철 숭의여대 교수 서평
“유마거사처럼 머리 긴 납자
만행하며 다양한 삶 떠돌아”

 

세속의 겉치레를 벗어 던지려 오랜 세월 만행하며 방황한 이형근 시인이 첫 시집을 냈다. 유능한 사업가로 성공한 CEO가 됐지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던 그다. 지난 16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난 이 시인은 “조계사에는 벌써 부처님이 오셨다”며 형형색색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봉축등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법화경>에 ‘돌아온 궁자(窮子)’라는 비유가 있다. 이형근(65) 시인의 첫 시집 서평을 쓴 전기철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이 시인을 법화경 속 궁자에 빗댔다.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50여년 객지를 떠돌다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온 아들. “그 아버지의 집은 오랜 만행을 거쳐서만 이를 수 있는, 하지만 아직도 몸을 사리면서 다가온 본래심(本來心)의 거처”라고 전 교수는 말했다. 이 시인은 오랫동안 시를 써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얼추 50여년이 넘는다. 긴 세월 시를 써왔지만 한번도 시를 세상에 내놓은 적 없었고, 지난해 ‘등 떠밀려’ <문학의식>을 통해 등단이라는 의식을 치렀지만 시단의 무리들과 어울려 다닌 적도 없다. 시인의 오랜 도반이기도 한 전 교수는 이런 시인의 삶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족하지 못하는 자아의 내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시집 첫 장은 세속의 겉치레를 벗어 던지려 오랜 세월 방황한 시인의 삶을 ‘시인의 말’을 통해 오롯이 전해준다. ‘저녁 어스름은/ 술잔 속에 고독했고/ 아침엔 햇살에 이끌려 다녔다// 이제 빈 밭에/ 그저 고즈넉하다.’ “허(虛)를 찾아 무명 속을 떠다녔고, 그 어둠 속에서 아침을 찾아 절대고독의 세계에 천착했을 것이다. 생사의 경계를 벗어나려 그 어스름 속에 빠졌고, 깨어나면 혼자 남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햇살 비추는 아침이 오면 일상에 이끌려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다.” 시인의 짧은 말귀에 실린 묵직한 마음자리를 전 교수는 이같이 설명했다.
이형근 시인은 인천 계양산 자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한창 뛰노는 어린시절에도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서 사색하며 시 쓰기를 즐겨했던 이른바 ‘문학소년’이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교내백일장은 혼자서 휩쓸다시피 했고 교지에는 시와 수필이 단골로 실렸다. ‘시대적 요청’에 힘입어 인하공대를 졸업해서 유능한 사업가로 성공한 CEO가 됐지만 한 순간도 시를 놓은 적이 없었던 그다. “빨리 일을 손에서 놓기 위해서 젊을 때는 불철주야 일에만 매달려 살았어요.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되니까 이젠 제가 빠져도 잘 굴러갑디다. 하하하. 이 산 저 산 오르내리면서 스님들과 토굴정진도 하고 한때 머리를 깎을까 생각도 안한 건 아니에요. 이제 60이 넘었으니 일 뿐 아니라 모든 걸 내려놓고 차향 선향 음미하면서 하루하루 마음 평안하게 살죠.”
전기철 교수가 전한대로 이 시인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 유마거사처럼 머리 긴 납자가 되어 다양한 삶의 길을 떠돌았다.” “공학도로서 학교에서 강의하던 때도 있었고, 사업을 하며 소유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산에서 산으로, 도(道)를 찾아 육지에서 섬으로, 또 도시에서 여수나 제주도, 강화, 중국으로 떠돌며 어디에도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시인의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바람’이나 ‘달’ 이미지 역시 이러한 만행에서 비롯됐다. ‘바람의 흔적은 쉼 없다// 흔적의 본성은 무한증식이다’(‘허깨비를 찾는가’ 中), ‘바깥바람 맴도는 게, 그 맴과 한 통속이네’(‘백팔번뇌’ 전문), ‘텅 빈// 한가로움을 위하여’(‘달에게 물어 봐라’ 中), 달은 물을 타고 밤을 어르는데// 밤은 별에 기대어 푸르러 가(‘홑씨를 사랑하리라’ 中)…. 바람과 달의 이미지는 어둠이나 밤의 이미지와 어울려 만행의 행려자로서 시적 자아의 표상이나 다름없다.

한낮, 詩가 무릎에 앉았다

이형근 지음 / 불교신문사

시인은 마침내 깨달음에 닿는다. 인간의 본성이 공(空)하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눈을 떠보니 세상은 봄이고 아침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글쎄요, 깨달음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어떤 깨달음도 확정적인 것은 없을 겁니다. 무명에서 벗어나 그냥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 뿐. 무아와 연기, 공의 세계가 온몸으로 훅 들어온 날이 있었고 그 희열은 엄청났어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경전을 탐독하고 밤새워 불교철학서적을 뒤져본답니다. 끝이 있겠어요?”
전기철 교수는 “세상의 욕망을 내려놓으려 산천을 떠돌던 궁자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은 차향이 그윽하고, 청아한 봄, 첫 봄이 이마에 송송이 맺힌다”며 이 시인의 시 ‘여일(如一)’을 꺼냈다, ‘우물가 작약꽃 보시시 고개 들고/ 마당 평상에 차향이 상큼합니다/ 첫물 녹차로 따끈하게 적시니/ 첫 봄이 이마에 송송 맺혔어요.’
시인의 평생도반이자 날마다 이른 아침 시인의 차벗을 해주는 부인 김찬주씨는 “남편 덕분에 매일 좋은 차를 만난다”며 행복해했다. 강화도 하늘재에 그림같은 황토집을 짓고 사는 이들 부부는 동트는 새벽녘 차를 나누면서 하루를 연다. 한두시간 다소 긴 시간, 부부는 차맛을 음미하면서 좌선을 하고 명상도 한다. 미술을 전공한 부인은 이번 남편의 첫 시집 표지를 직접 디자인했다. 시집 제목도 그녀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손글씨다. 남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작품세계에 걸맞는 맞춤형 표지인 셈이다. 담백하고 청정한 남편의 시에 곱고 청정한 옷을 입혀주고 싶은 마음이 표지에 담겼다.
시집에 자리잡은 80편의 시는 ‘선(禪)을 닦는 과정에서 터져나온 언어’와 다름 아니다. 불교에 천착하고 살지만, 동네 신부님과 절친으로 지내는 시인이고 가끔 술한잔 하고 귀가할 때는 한참 동생벌인 대리운전기사와 밤새워 술잔을 기울이는 그이기에, 시 곳곳에는 위트와 재치도 넘쳐난다. ‘고려산 기슭/ 푸른 연꽃 앉은 청련사/ 하안거에 든 보살 느티나무…깨우쳐 어찌 쓰시는가’(‘각하용’ 中), ‘…여린 봄 내려앉은/ 석모도 골바다 아릿해/ 붓 춤추는 베네딕도 조 신부는/ 스님의 십자가에 나무관세음보살’(‘스님의 십자가’ 中), ‘…호킹이 어제 별로 떠났어/ 시간의 역사 그 순환 속으로…명치에 블랙홀이 깊어지더니/ 뇌가 화두껍질처럼 부서지고 있어/ 육천도가 육천신이야’(‘뇌의 무게-일천사백그램의 중력’ 中).
마지막 시 ‘무아’는 공을 중심으로 한 법음 그 자체다. ‘곡우에/ 내린 비/ 살그머니/ 찻잎에 찬 봄/ 한 잔에/ 이 法音// 나/ 그냥 간다’(‘무아’ 전문) 첫 시집이 나온 뒤 “나의 시가 이렇게 세상에 나와서 다녀도 되는 건가 싶다”는 시인의 겸양이 결국 화두가 돼버렸다.
 

50여년 무르익은 법음이 詩가 되다

이형근 시인은…

공학도 출신에다 기업가로 승승장구한 이형근 시인이 선(禪)을 표방하는 시집을 낸다는 것 자체가 뉴스다. 하지만 그를 곁에서 보아온 지인들은 왜 이제야 냈냐는 기세다. 자연인을 표방하면서 스님들과 벗하며 일찌감치 이 산 저 산에서 살다시피했고, 느지막이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들어가 불교학도 훑었던 그이기에. 시인은 본래 자연에 존재하는 것에다 작위적 위를 만드는 것이 공학이라고 한다면, 이 공(工)이나 저 공(空)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재치꾼이다.
이 시인에게 시 만큼이나 친근한 벗은 차(茶)다. 찻물 끓이는 일로 하루를 열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하루가 끝난다. 중국에 사업체를 확장해서 칭다오에 거처를 마련한 뒤 가장 먼저 뛰어든 일도 지역 차인들과의 만남이다. 칭다오 라우산 강변에 작은 차문화원을 열어 차를 시연하고 함께 나누면서 쉼없이 차공부를 한다. 1년 중 태반은 칭다오에서 사는 시인은 “가장 호젓하고 고요한 일상에서 차를 마시고 음식섭취도 최소화하면서 시도 쓴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면 공항에서부터 김치찌개며 매운탕이며 음식생각에 군침이 돌고, 보고싶은 도반들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다보면 아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며 환하게 웃었다. 강화 심도학사에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등과 종교철학이 대해 토론하고 연찬하면서 마음공부에 매진하는 그는 지난해 문학계간지 <문학의식>에서 신인문학상으로 선정, 문단에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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