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불문연 HK연구단, 허남린 교수 초청강연 개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단(단장 김종욱)은 지난 19일 동국대 충무로영상센터 본관 불교학술원 강의실에서 해외석학 초청강연을 개최했다. 이날 허남린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대 교수가 참석해 ‘근세 일본의 불교문화’에 대해 강연했다. 근세일본과 조선의 종교문화를 전공한 허 교수는 임진왜란으로 범위를 확장해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날은 근세(1600~1868년) 일본불교문화가 융성했던 원인과 영향을 살펴봤다. 당시 일본 사찰수가 10만개 이상으로 조그만 동네에도 2~3개씩 있을 정도로 사원이 증가했다. 불교가 활성화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허 교수는 도쿠가와막부의 기독교 탄압정책을 꼽았다. 1650년부터 메이지유신 후 종교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250여 년간 일본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찰 주지 스님으로부터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란 증명서를 발급받아서 관청에 제출해야 했다. 이를 사청(寺請)제도라 한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할 수도 있던 시대인만큼 주지 스님의 증명서는 중요했다. 정부 업무를 대신하면서 사찰은 단가제도(檀家制度)를 만들어 신도들의 사자의례를 책임졌다. 장례와 49재 외에도 100일, 1년, 3년, 7년, 33년 상을 챙겼는데 이는 사찰의 주요 재원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백중인 오봉 때면 스님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기도를 해주는데, 3만 엔부터 많게는 5만 엔까지 기도비를 낸다. 우리 돈으로 30~5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허 교수는 “일본 불교문화가 풍성할 수 있었던 것은 에도시대부터 재정이 뒷받침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기도를 통해 뭔가 이루고자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잘 활용했다. 10만개 사찰마다 각각의 부처님을 봉안해 시험 볼 때, 아플 때마다 기도하는 도량을 구분해 놓은 게 대표적이다. 불상을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다가 수십 년 만에 한 번씩 공개하기도 한다. 선광사 비불은 7년마다 한 번씩 공개되는데, 그 때마다 700만~800만 명이 몰려든다. 지역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메이지시대에 들어 국가권력에 의해 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제기되면서, 불교는 활로를 찾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는 등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단가제도를 통해 장례의식을 주관하면서 지금까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허 교수는 “근세부터 일본불교는 장례의식을 책임지는 곳이자 사람들 바람을 이뤄주는 기도처였으며, 놀이의 장소로서 역할을 수행했다”며 “일본에서 순례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런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신문3387호/2018년4월25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