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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축특집] 소설가 김연수의 우리에게 부처님 오신 뜻

기사승인 2018.05.19  06: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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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해답 없는 질문만의 인생이어도 괜찮아…”

인도 쿠시나가라 열반당의 ‘부처님 열반상’.  불교신문 자료사진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내가 자꾸 손톱을 물어뜯으니까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어머니는 내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며 입 쪽으로 간 내 손등을 때리곤 하셨다. 그때 여든 살을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그건 마치 터널의 이쪽 편에 서서 멀리 반대쪽의 입구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여든 살이 되겠지. 지금은 터널 이쪽에서 바라보니 알 수 없는 것들뿐이지만, 터널 저쪽에서 돌아보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글을 읽고 그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의 처소로 황급히 찾아나선 노인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 아난이 그를 막아세우자, 그가 말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부처님이 아닌 이상, 여든 살이 된다고 해서 궁금한 것이 저절로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아직도 손톱을 물어뜯는 내가 쉽게 그런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내게도 궁금증이 생긴 건 고등학교 시절이다.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오면 이따금 시골집 지붕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마을의 불빛도 소박했고, 미세먼지 같은 것도 없었으며, 내 시력도 아직은 좋았기에 밤하늘 전체가 빛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빛은 회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신기해 나는 밤새 회전하는 거대한 천구를 바라봤다. 그러면 자연히 어떤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이런 질문. 또, 다른 질문도 떠올랐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고 난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도 이 세상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 뒤로 몇 년 간, 나는 지붕 위의 의문을 늘 생각하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날 가슴 한 쪽이 턱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이 세계는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이라든가, 죽은 뒤의 세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심했다. 내가 죽은 뒤에 이 세계가 그대로일지, 아니면 나의 죽음과 함께 그대로 사라져버릴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불확실하니 모든 게 답답해졌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인생이 긴 지 짧은 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길든 짧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당장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데.

그 다음의 수순은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2562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팔만대장경 중에 어딘가에는 반드시 내가 가진 질문의 해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고 그 해답을 바로 알아냈기 때문에 답답했던 마음이 풀렸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해답을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을 해보지만,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질문을 떠올리면 답답하고, 결국 그 해답을 알지 못한 채 죽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고 답답함은 한결 누그러졌다. 그건 벌써 2500년도 더 전에 어떤 고귀한 분이 나와 똑같은 질문을 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답답함이 걷혔다. 비록 그 분은 해답을 얻었다니 그대로 따라하면 되겠다는 희망이 나한테는 무리가 아닐까는 의심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부처님의 말씀은 내 답답함을 달래주었다. 물론 중요한 것은 해답이다. 하지만 내게는 해답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게는 질문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나는 부처님에게서 그 사실을 배웠다.

얼마 전, 서정주 시인의 둘째 아드님을 뵈었다가 형님 이름이 ‘승해(升海)’가 된 사연을 전해들었다. 바다에 빠진 구슬을 건져보겠다고 됫박을 들고 바닷물을 퍼내는 아이처럼 살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래서 첫째 아드님은 쉰 살이 넘은 뒤에도 새로 변호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등, 그 이름값에 걸맞은 인생을 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구슬을 건지셨나요, 라고 여쭤봤더니 그런 것 같지는 않으시다는 말씀이 돌아왔다. 그럼 이젠 그 됫박이 그 분에겐 구슬이 됐네요. 내가 말했다.

열반하실 때까지도 부처님은 남은 이들에게 뭔가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늙은 뒤에도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한 그 노인에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지금이 바로 물을 때다. 궁금하면 물어보라”였다. 아마도 그 노인은 평생 질문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부처님은 그 노인에게 질문을 평생 품고 산 그의 삶 자체가 해답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해답을 받은 분이 분명 계시겠지만, 내게 부처님은 해답이 없는 질문만의 인생이어도, 그래서 한없이 어리석게 일생을 보냈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으니 지금 질문하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불교신문3394호/2018년5월19일자] 

김연수 소설가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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